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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들의 영화 - I

2019년 04월 14일(일) 13:26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박하식-소설가

(- 경북 봉화 38년 생. 87년 단행본 <이승의 옷>으로 등단.
- 작품집 : “소백산 밑에 빛을 남긴 사람들” “상락향” “무수촌” “마음에 헌 번 핀 꽃” “잃어버린 땅” “영주에 살면서” “단군의 눈물” 등
- 수상 : 금복문화상, 경상북도문화상, 한국예술문화상. 월탄 박종화문학상 등.)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하늘의 계시는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잠들지 않는다. 우주 삼라만상은 유구한 흐름 속에서 항상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변화를 모색한다. 그리고 늘 사랑을 꿈꾼다. 오행(五行)의 운행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일어나는 태극의 음양 시분(始分) 현상인 기의 흐름은 사랑의 풍화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역(易)이다. 역의 변화에 따라 만상이 생멸하며, 분열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항용 인위적으로 물리적인 힘에 의해 일어나는 변혁은 하늘의 뜻이 아닌 폭력적일 수 있다. 남을 단두대로 보내는 혁명은 하늘의 순리가 아니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천지병(天地病)이 들어 치유능력이 불가능한 부패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늘의 뜻인 혁명이라 할 수 있지만, 하늘의 변화가 아닌 인간의 야망에서 일어나는 인위적 정권 탈취를 합리화하는 것은 운명적인 선택일 뿐 분명 하늘의 뜻은 아닌 것이다. 한웅 할아버지가 태백산하에 신시를 개척하신 오천년 역사를 지닌 조선. 약 6백 년 전 태조 이성계는 하늘의 뜻에 따라 백두산, 태백산, 금강산 산신령의 허락을 받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는 역성혁명을 이룩했고, 아들 이방원은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차지했고, 세조는 어린 조카 단종을 영월로 귀양 보내 죽이고 정권을 탈취했다. 박정희대통령은 5.16군사쿠데타-혁명을 일으켜 산업화 조국근대화 창조를 했다. 이 모든 것이 하늘의 뜻인지는 모른다. 그 후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숱한 권좌를 누리기 위해 일어난 정치 변혁과 쿠데타들, 그리고 짓밟힌 백성들, 거기에 정의란 이름 아래 수 없는 애매한 형제의 목숨들이 죽어갔다. 그러나 무심한 하늘은 말이 없고, 신이 아닌 인간은 어느 것이 혁명이고, 어느 것이 쿠데타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광복 후 이 땅에 정의를 외치는 어떤 신문도, 학자, 위대한 정치가도 우리의 허리를 반으로 동강내 불구를 만든 미․소의 잘못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 분단 세월이 백년의 침묵을 지키며 흘러가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한․중․일 3개국 공동화폐 발행을 주창한 ‘동양 평화론’을 쓴 지상 평화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끝내 폭력의 수단을 선택해 일본 총리대신으로 러일전쟁과 한일합병의 기초공작을 수행한 동양평화를 깬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총으로 쏴 죽인다. 일본에 의해 안 의사는 테러범으로 처형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안중근의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고 총 맞아 죽은 이토 히로부미가 테러이스트이다. 생사를 뛰어넘어 산 안 의사는 정의의 표본 같은 분이시다.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 목숨을 바치는 멋진 조선의 생사를 초월한 남자다. 용기와 정의감, 따뜻한 인간애, 종교적 헌신성의 풍모를 두루 갖춘 영웅호걸로 세계의 숭앙을 받는다. 그러나 일본이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세계를 제패했다면 안 의사는 영원한 테러범으로 오명을 벗을 수 없는 역사의 그늘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힘은 모든 것을 정당화 한다. 그러기에 총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전쟁의 승리는 폭력이 아닌 평화다. ‘성공한 쿠데타는 쿠데타가 아닌 혁명이다’ 쿠데타를 한 권력이 자기가 한 일을 쿠데타란 기록으로 남긴 흔적은 없고, 그러니 언제나 쿠데타는 역사 속에서 정의와 혁명으로 기록을 남길 뿐이다.
그러면 대체 쿠데타를 일으키는 자는 누구고 죽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우주의 법칙은 인간이 정도에 벗어나는 짓을 한 사람은 자기 양심의 가책을 받고 천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렇지가 않다. 꼭 내가 가져야하고, 내가 갖고 싶으면 뺐고, 남이 가지면 안 되는 사람에게 하늘은 천벌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양심은 감옥을 가고, 불의의 왕권은 기세등등했다. 인류역사는 불의의 힘이 땅을 지배하게 한다. 하늘은 심술궂은 장난꾸러기가 아니면 못 믿을 지랄 같은 변덕쟁이다. 바보들이나 하늘을 쳐다보며 믿는다. 하늘은 불의를 저지른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며 더 큰소리 치고 희색이 만면해 행복을 누리며 잘 살게 하는데 비해 정의의 사자들은 그 앞에 비굴하게 죽어가게 했다. 불의의 승자 앞에 정의의 사자들은 얼마나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죽어갔던가. 하늘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우주법칙에는 선악이란 본래 없고, 인간들이 만든 선악이 있을 뿐, 악에 대한 벌이나 하늘의 도는 원래 존재하지 않고 없는 것이다. 하늘의 섭리란 없는 것일까.
나는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양심대로 착하고 부지런하게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다. 하늘이 너무 슬프다. 나는 오늘도 내 가슴에 대고 질문해본다. 하늘은 있는가. 선악은 있는 가 없는가. 대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이며 악인가 선인가. 이타적인가 이기적인동물인가.
지구의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유토피아다. 약육강식의 동물들의 축제장이다. 대자연의 법칙은 봄가을의 순서와 인고의 일정한 생성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지만, 인간 사회는 그게 아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회개만하면 되는 것이 종교다. 편리하다. 그러니 꼼수와 힘으로 통한다. 파도만 잘 타면, 줄만 잘 서면 성공을 거둘 수 있고 온갖 영화도 누릴 수 있다. 가장 이상주의란 민주주의 선거도 필요하면 악과 야합하며 누구에게나 무릎을 꿇고 편리한대로 살아가는 인간이 승리한다.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찍어놓고 보면 언제나 옳은 인간은 없었다. 꼼수에 다 걸린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애국자 여러분, 배고픈 농민의 아들” 이란 말은 입에 사탕발림 거짓말이다. 그런 역사 속에서 정의의 패자는 언제나 불의의 승자 앞에 무릎을 꿇고 죽어가는 것이다. 정의와 진리, 도덕은 항상 지구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허울 좋은 개살구로 승자들의 헛구호에만 있을 뿐, 결국 인간은 악인의 선을 위장한 생물학적 적자생존 법칙에서 살아가게 만들어져 있다. 인류문화란 그렇다. 그런 선악의 분별없는 인생의 길 선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하루아침에 정승이 되고 어떤 사람은 역적이 되어 죽어 이슬로 사라져갔다. 인생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의 목숨인들 다 귀중하고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명은 없다. 그러나 비명횡사나 참살을 당함은 생명의 순리가 아니다. 자살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인간은 고종명(考終命)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딸 칠 공주를 내리 낳고 불공 끝에 만득자를 얻어 칠거지악을 겨우 면한 우리 어머니는 어린 내 고추를 쓰다듬으시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목숨만 길어 씨만 퍼져다오” 눈물을 흘리며 번식과 자연사를 말씀하셨다. 늙어보니 그 말씀이 맞는 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죽음을 맞는 모습은 저마다 다르다. 세상은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도 살아있는 사람이 있고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있다. 공자,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최영장군, 김종서, 이순신장군, 안중근의사, 이준열사, 김구선생, 유관순 열사는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조선 땅에 일제 강점기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부모수지를 깎지 않으려고 3백여 명이 자결을 했고, 만주벌판에서 풍상노숙을 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수 천 명의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바쳤다. 그리고 효자, 충신, 열녀의 삶을 살다가 간 형제들의 죽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 밤하늘의 별이 되어 항상 이 땅의 우리 영혼의 등불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정도의 길을 가다가 치명적인 불이익을 당하거나 아니면 죽음밖에 없는 운명을 목전에 당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삶과 죽음, 생사의 기로에선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인간이 보통 살아가는 일은 영혼과 양심에 따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살면 그만이지만, 이럴 때는 그게 아니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눈앞에 있다. 하루아침에 정승이 되기도 하고, 역적으로 당장 개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가족과 가문의 멸망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는 흔적을 남기고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를 수 없이 보아오면서 살아왔다.
인생은 정의의 죽음을 택하느냐? 불의의 영화를 누리느냐? 세상에는 정의의 죽음을 택하는 길 보다는 불의로 생의 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흔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세상의 영화를 누릴지라도 지구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짐승들이다. 그들은 물질주의의 숭배나 인간가치 말살을 생의 구현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사회는 살아보니 그런 사람들이 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로 볼 때 자기 욕심대로 살 수 있는 권한을 우주로부터 부여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렇게 살아도 되는 권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고 인간이 남을 생각하며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태어났다면 그렇게 살아서는 죄인이다. 인간이 다 사람의 본성을 잃고 야욕으로 욕심만을 채우며 물질이나 명예를 추구하며 살았을 때, 영혼 없는 인간이 그 무슨 인간의 존재론적가치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런 사회나 집단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존속한다 해도 아무 가치 없는 문명일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한 번 잘못 든 길을 빠져나오지 못해 후회하고 비탈길을 걸으며 살기도 하고, 한번 잘못된 선택에 씻을 수 없는 한으로 평생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숨 쉴 때마다 후회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역사 앞에서 수없는 정의의 죽음과 불의의 영화를 보면서 살아왔다. 생사가 엇갈리는 운명 앞에서 진정 어느 길을 택하여 사는 길이 옳은 길인가.
나는 어린 시절부터 어느 삶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 하며 살아왔다. 만약 내가 가는 길에 그런 운명이 온다면, 그런 기로에 섰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그러나 다행히 큰 인물이 되지 못한 나의 인생길은 남을 죽일 만큼 위대하지도 못했고 죽임을 당할 만큼 잘나지도 못했기에 생사를 가늠할 그런 끔직한 선택의 기회는 없었다. 어머니 말씀처럼 목숨만 길어야할 80평생을 살아오면서 생사와는 관계없으나, 사소한 것들, 재산과 명예에 큰 이익이 오고 손실이 오는 일들, 사회와 직장 상사, 동료, 이웃 간에 정의를 지키면 큰 불이익이 오고, 강자 앞에 불의를 눈감아버리고 묵인 동조하면 큰 이익이 오는 그런 일들은 부지기수였다. 불의인줄 알면서 “예”하고 이익을 쫓아 해바라기처럼 살면 괘씸죄에 안 걸리고 큰 이득이 오는 줄 아는데 그러지 않고 혼자 “아니요” 했다가 힘 앞에 불이익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니요” 했다가 죽음 같은 고통을 당한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 인생을 살아가는 길에 “아니요”가 당장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하나 쌓이어가면서 오는 빈부의 격차와 고통은 큰 차이를 빚었고, 종내는 그 고독과 가난의 누적이 노년의 생활에 산덩이 같은 빈곤과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정의의 삶이 별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예”로 요령껏 눈치껏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승진과 부가 축적되면서 그 가정이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비해 “정의”로 사는 사람은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그 사회집단에 소외되며 아내와 자식들은 고통을 받으며 불행하게 살아야했다. 그리고 “아니요”의 노년의 빈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괄시당하면서 사는 눈물의 씨앗이었다.
그러기에 나는 솔직히 말해서 육신이 한줌 흙으로 돌아가야 할 늙은 목숨을 목전에 두고서도 세상에 정의와 불의는 있는가. 세상에는 쉽게 사는 방법을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불의의 삶에 대한 정의의 삶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어느 삶이 옳은가에 대한 정답을 얻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알기위해 유년시절 할아버지께 물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떤 일에도 하늘(天), 도(道), 경(敬), 인(仁)을 근본으로 삼고, 사단칠정(四端七情)인 인의예지에만 따르면 된다고 말씀하셨고, 아버지가 보내준 신식학교 교육에서는 인간완성에 학문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출세지상주의의 이 땅의 교육은 물질을 본질로 한 과학적인 정의만 있을 뿐, 어느 스승에게서도 그 정답을 들을 수 없었다. 또 그것을 알기위해 어디를 가도 답을 못 찾고 숱한 종교를 찾아 헤맸지만 그곳에는 온통 천당과 극락, 약자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지옥의 귀신들만 웅성거릴 뿐,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경전을 더듬으면서 생각하고 터득한 것은 “이것이다” 하고 꼭 집어 말한 것은 없이 공자와 맹자 성자들이 하늘과 땅 인간의 천리(天理)를 비유하여 인본주의를 설명한 것들뿐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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