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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 (44) 봉화 금씨의 물야 뒷결 마을 이야기

봉화문화연구회 이 기 락

2019년 04월 21일(일) 15:09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뒷결 마을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뒷결 부락에 서있는 남근석.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500년 역사의 쌍송정침 모습.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죽창 거사 봉화금씨 금오(琴梧)의 묘소.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죽창 선생 문집.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모든 만물이 음양으로 이루어졌고, 세상사 모든 일의 사정(事情)에는 전후좌우(前後左右)가 있기 마련이다.
좌우는 가끔 우왕좌왕(右往左往)과 같이 우좌로 말의 앞뒤가 바꾸어지기도 하나 전후는 앞과 뒤로서 바꾸어지는 낱말이 없다.
그러나 부락명과 같이 고유명사는 앞뒤가 바꾸어 질수 있으니, 물야면 북지리 뒷결(後浦) 마을은 앞결(前浦) 마을 보다 훨씬 먼저 형성되었고 앞결은 뒷결에 부속된 마을이었다고 한다.
또한 뒷결 마을은 이 퇴계는 하찮은 가문출신이라고 무안을 준, 봉화 금씨의 뿌리 깊은 양반 가문 자존심이 배어있었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뒷결 마을이 궁금해, 지난 4월초 이 마을을 찾았다.
봉화에서 출발 917번 도로를 따라 물야면 경계로 들어서고 북지2리 마을 회관을 지나고 앞결 버스 승강장이 있는 갈림길에서 좌회전해 포장도로를 따라 서북쪽으로 1키로쯤 들어가 있는 마을이다.
10여년 전 이 마을로 귀촌한 이윤직(71) 학군단 선배께 전화하니 마을 회관 앞에 나와 있단다.
마을 중간 느티나무 밑에서 마침 이 마을 전 이장 박두훈(66) 씨를 같이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지마을 탐방기를 위해 <봉화군지>와 <봉화의 촌락과 지명> 책에서 읽은 내용 중 궁금하던 쌍송정(雙松亭)과 선돌(촛대바위)에 대해 물으니 “봉화금씨의 쌍송정은 영남대학교로 옮겨가서 없고 고가(古家)는 주인이 여러 번 바뀌어 저기 있다”며 “봉화금씨가 세운 쌍송정 정자는 금씨가 망해 능참봉을 지낸 밀양박씨 증조부 (묘비 확인 결과 朴鍾遠)께서 샀다가 다시 영월 엄씨에게 팔렸고 다시 진성이씨로 넘어 갔다”고 말해준다.
“촛대바위는 자연석으로 남근석을 닮았고 어릴 적 그 위에서 흔들며 많이 놀았으나, 50여년 전 어느 술 취한 청년들이 흔들어 3동강으로 부러져 버렸는데, 그 후 마을에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겨 남근석을 새로 만들어 세웠는데 20년 전 일이지요” 한다.
다음으로 마을 노인 회관을 찾아 갔다.
마침 노인 회장 금동우(85세) 어른과 금정하 어른, 금옥하(76세)씨를 만날 수 있었다.
봉화 금씨에 대해 물으니 “봉화금씨 시조는 태사공 금용식(琴容式)이라 하나 기록이 분명치 않고 고려명종 때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낸 영렬공(英烈公) 금의(琴儀)를 중시조로 모신다” 한다.
뒷결 부락의 입향조는 봉화금씨 13세 금혜(琴嵆.1399~1484)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뒷결로 입향, 쌍송정을 세우고 성리학을 강수(講修) 하며 살았고 그가 살던 집이 쌍송정침이다.
쌍송정 옆의 두 소나무는 일찍이 사라졌고 권력과 부(富)의 부침에 따른 쌍송정은 우여 곡절을 격으며 영남대학교로 옮겨(1975년) 갔고 쌍송정침은 세월 따라 주인이 바뀌어도 보수를 하며 현재 경북도 민속자료로 남아 있다.
노인회관에서 맛있는 돼지 뼈다귀 국의 점심 대접도 받고 난후 인사를 하고 “쌍송정 조부는 나의 17대 祖이며 종손은 여기 살지 않는다”라 한다.
금옥하씨의 설명 후 그의 집으로 가서 족보와 문집을 볼 수 있었다. 족보에서 퇴계선생이 봉화금씨를 며느리로 맞고 이 마을에 와서 수모를 당했다고 전해오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알 수 있었다.
쌍송정의 아들 간(衎)은 성주판관을 지냈고, 손자 치담(致湛)은 인동현감, 증손자인 오(梧.1486 ~1574)는 진사로 4형제(梧, 椅, 梓, 櫟)의 맏이 였고, 자칭 죽창처사(竹牕處士)로 대쪽 같은 성격에 효자로 알려졌고 후학을 가르쳤다.
막내 동생 력(櫟)이 퇴계와 사돈을 맺게 되었는데, 뒤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죽창처사는 동생 집을 찾아가 “우리 가문이 4대째 내려온 진사 가문인데 어디 하찮은 아전 출신 집안과 사돈을 맺었느냐” 며 퇴계가 앉았던 마루를 대폐로 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죽창의 묘갈명은 눌은(訥隱) 이 광정이 썼는데 “성품이 대쪽 같고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의 상(喪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지냄에 흰색의 까치가 함께 했다”고 적혀있다.
죽창 선생 문집을 보여주는데 읽을 실력이 못 되어 아쉽다.
묘소가 마을 가까이 해저리 넘어가는 재궁골 길목에 있다기에 같이 찾아갔다.
길가에서 멀리 올라가지 않은 언덕 산 , 문수산이 잘 바라보이는 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처사죽창봉성금공지묘(處士竹牕鳳城琴公之墓)’ 봉화 금씨의 古家로 가니 쌍송정침 안내판에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통가옥으로 도민속문화재 125호로 기록되어 있다.
이동선(65세) 부부는 20년전 이 집을 구입하여 6년 전 이사와 살고 있다 한다.
남근석(男根石)이 서 있는 마을 입구, 그곳 옆에 살고 있는 류수영(74)을 만났다.
“뒷결은 옥녀봉을 정상으로 해서 생긴 곳으로 압결골 등 여성의 성기(性器)를 닮은 음기(陰氣)가 센 마을이라 해서 오래 전 자연 남근석을 세웠으나 술 취한 청년들의 장난으로 부러져서 다시 세웠으며, 이곳에 이사 온지 25년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 세워졌으니 30년 쯤 된다”고 설명해 준다.
전설로 내려오는 어느 고승과 금씨 종부의 베틀고개 이야기나 학이 날아간 바위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니 거론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고, 한 때 150가구 살았던 큰 동네로 압결과 구산(龜山) 마을도 금씨의 세력 하에 있었다.
현재는 40여 가구로 봉화 금씨가 10여 가구로 그래도 제일 많고 여러 성(姓)씨가 살고 있으며 최근 귀농 귀촌한 집도 5가구 정도며 주업은 논농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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