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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들의 영화 - Ⅲ

2019년 04월 28일(일) 14:23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박하식-소설가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이전호에 이어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막지 못한 것을 평생 죄인으로 자처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던 김시습은 기구한 일생을 방랑하다가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1세를 일기로 슬픈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홍산 무량사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이 산문 한쪽 귀퉁이에 걸려 있다.
그러나 그 영정마저 진본은 도둑이 훔쳐가 잃어버리고 없고 새로 그린 영인본이 보존돼 있으며 승속의 구별 없이 절도 중도 아닌 삶을 살다간 그의 영혼은 세상에 죽어서도 어정쩡한 대우를 받고 있다.
범옹 신숙주는 세조의 즉위 과정에 가담하고 그 후 요직을 두루 거치는 등 사육신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살아 영화의 삶의 길을 걸었다.
그의 삶은 후세인들에 의해 변절자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뛰어난 학문과 치적은 조선 후기의 문물을 정비하는데 나라에 큰 공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무상한 세상은 그도 영원히 살지 못하고 죽기는 했지만, 오늘날 그의 영정은 보물613호로 충북 청원군 구봉영당(九峰影堂)에 모셔져 있고 후손들은 대대 번성과 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
왕방연과 할아버지
1456년 문종이 승하하자 단종이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권에 눈독을 들인 숙부 수양대군에게 단종은 실권을 빼앗기고 상왕이란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 처사가 온당하지 못함을 지적하며 항거, 단종을 복위하려든 사육신이 무더기로 처형되고, 결국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는 옥사가 벌어졌다.
1457년 순흥도호부로 유배된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다시 단종 복위운동을 도모하다가 발각, 정축지변으로 순흥부는 폐부되고, 신숙주의 육촌동생 한동진 안동부사 관군의 무참한 살육으로 남아는 어린이까지 죽여 순흥 땅은 시체가 산을 이루고 흐르는 죽계천(竹溪川)에 사람의 피가 순흥면에서 영주시 구성공원 제민루까지 30리나 강물처럼 흘렀으며, 순흥부 민초들의 무참한 도륙과 함께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은 역적으로 처형당해 그 시체는 오늘날까지 찾을 길 없다.
그리고 그들의 불의는 정의를 역적으로 몰아 삼족을 멸했다.
어린 단종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그해 시월에 귀양지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는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영월에 귀양 안치하고 돌아가는 길에 강가에 홀로 퍼들어 앉아 부른 슬픈 노래이다.
왕명을 따라 천만리 먼 곳에 와서 모시던 어린 왕, 태어 난지 이틀 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불쌍하게 자란 단종을 이별하고 돌아가지만, 마음 둘 곳을 잡지 못해 영월 청렴포 냇가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내 슬픈 마음과 같이 강물도 울면서 밤길을 가는구나!… 하고 가슴으로 울면서 부른 참으로 아픈 노래이다.
의금부도사는 이렇듯 애절한 노래를 부르며 관리로써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지만 지은 죄는 냇물의 영원한 흐름 속에서도 씻을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을 흘러 보내고자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 것이다.
단종을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세조가 단종을 죽이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소문이 궁궐 안에 떠돌자 의금부 군노들은 하나 둘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는 임무가 자기에게 부여될까봐 칭병을 하고 모두 도망을 가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사약을 가지고 가겠다.” 고 선뜻 나선 선비가 있었다. 바로 우리 할아버지셨다.
늦게 등과를 해 고려 왕조부터 수많은 정변이 있을 때 마다 파도를 잘 타고 줄을 잘서야 출세를 한다는 것을 배워 아는 할아버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선비의 큰 꿈인 출세와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다.
꿈을 이루어 가문을 빛내는 영광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 할아버지는 유학을 헛배운 그런 가유(假儒)였던 것이다.
신숙주주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세조는 크게 기뻐했다.
“조선에도 큰 인재가 있구나! 그 사람을 크게 등용하라”
그 길로 우리 할아버지는 말 한마디 잘한 공으로 벼슬이 승승장구 크게 올랐다.
장악원 부사직에서 중추부사를 지내고 공중 나는 새도 일갈에 떨어뜨린다는 경상도관찰사를 제수 받았다.
천륜을 저버리는 것을 옳다고 나선 할아버지의 벼슬길은 백성들을 돌보는 정사는 선정을 얼마나 베풀었는지 모른다.
그 정신분자 속에 애국심이 있으면 얼마나 울어 나올까.
그러나 오늘날 어느 역사와 문집에도 할아버지의 치적 비문에도 하늘 높은 칭찬뿐, 잘못했다는 가유란 기록은 한 구절도 발견할 수가 없다.
부정축재로 재산증식을 해 고향에 대궐 같은 집을 짓고 명산 절경을 찾아 지은 권세를 과시한 정자에는 가는 곳마다 현판이 걸려있고 오늘날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보호받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는 ○○군을 봉군 받고 영정을 하사 받는 등 세상의 모든 영화를 누리고 그 영정은 보물로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정은 사당과 기념관 전국 여러 곳에 봉안돼 있고 춘추로 유림들이 모여 존경하는 향사를 올리고 그 앞에 엎드려 유권을 쓰고 고개를 숙여 존경하여 마지않는 제를 올린다.
존경받는 할아버지는 부인을 네 명 두셨다. 넷째 부인은 스물여섯 살 연하의 딸 같은 처녀로 16세에 시집왔다.
지체가 낮은 집 딸의 미색을 탐내 뺏다시피 했다.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은 사연으로 할아버지 사후 할머니는 네 부인중 많은 농토와 재산을 물려받았다. 나는 그 할머니의 후손이었다.
그 씨는 얼마나 많이 퍼졌던가.
후손들은 4백여 년 동안 번창했다. 인간은 자기를 좋아하는 인간을 좋아하고, 인간이 인간을 평가하기 때문에 그 당시 세조의 세도가와 공신, 같은 인간들이 끼리끼리 어울려 대를 이어 사돈을 맺고 돌려가면서 벼슬을 했다.
후손들의 과거 점수를 후하게 봐주기 때문에 등과에도 큰 벼슬이 줄을 이었다.
아들 할아버지들은 아무리 못난 후손도 최하로 음사(蔭仕․ 조상의 공덕으로 얻는 벼슬)로 줄줄이 군수를 했다.
조선시대 군수는 3년만 하면 평생 먹을 부수입과 뇌물이 들어와 부귀를 누리는 자리였다.
그들은 친손뿐 아니라 사위와 외손에 이르기까지 재신(宰臣)에 이르렀다.
그리고 양반 자랑을 했다.
그 할아버지의 피를 받은 후손들은 일제 때에는 친일에 앞장섰다. 일본관광을 다녀온 머리가 영특한 일본말을 나불거릴 줄 아는 그 아들들은 일본 학교를 나와 개화기의 물결을 타고 일제하에 경찰서장과 군수가 되고, 조선총독부에 근무를 했다.
면장을 하고 스승을 하고 대학교수를 하고 역사학자가 되어 단군을 신화로 역사를 왜소 날조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까불지 마라 36년간 감히 어느 조선 놈이 그 앞에서 고개를 높이 들 수 있단 말인가.
일본 관허업인 소금배급소와 정미소 양조장 허가를 도맡아 받아 치부를 했다.
또 그 후손들은 미국을 다녀왔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미군이 이 땅에 진주하자 “반탁”을 빨갱이로 몰며 “찬탁”을 하늘 높이 외치며 반미척결에 앞장을 섰다.
그들은 미국 유학을 가고 교회와 학교를 세워 목사가 되고 학장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 사립학교와 교회가 보호받는 법을 만들어 치부를 했다.
시장 군수가 됐다.
서울에 고층 빌딩과 시골 농장과 명승지에 별장을 짓고. 소백산맥과 같은 임야가 있고, 남해 섬에 돔 양식과 덕장을 시설했다.
세상은 양지가 있으면 그늘이 있기 마련인데 그들에겐 따사로운 햇빛뿐이었다.
그의 고향과 이 땅은 그들의 땅이었다.
대한민국의 하늘을 그들이 지배했다.
할아버지의 고귀한 역적의 피를 물려받은 나는 할아버지 덕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은 대우를 받았다.
산맥처럼 뒤에는 배경이 버티고 있고, 호화로운 저택에서 명문가의 후손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았다.
일본 조선총독부에 아부하는 왕자도 부럽지 않은 아버지를 두고 자라 소위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온 나는 학벌을 자랑하며, 유수한 부자 가문에 장가들어 풍족한 살림에 아들딸 낳고 잘살고, 평생에 손에 흙 한번 안 묻히고 남이 지어놓은 농사를 맛이 있다 없다 티 뜯으며, 가격을 맘대로 법으로 조작하고, 남이 굶주릴 때 나는 배터지게 먹고, 남을 무시하고 나는 잘난 사람으로 갑질을 하며 남은 못난 사람으로 죄책감 없이 똥개처럼 살아도 어느 말 한마디 없는 이 하늘밑이었다.
오늘날 광복된 대한민국이란 분단의 조국 하늘아래 애국자란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영화를 누리는 사람들 중에 진실로 나라를 잃었을 때 만주벌판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풍상노숙을 하며 절개를 지키다 죽은 후손들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다.
우리 고향에 그 후 당시 세조에게 아부를 하던 공신과 벼슬아치들을 등지고 낙향한 선비들은 죽을 때 후손에게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내 자손은 ○○의 후손과는 절대 사돈을 맺지 말라”
우리 할아버지를 두고 한 말이다. 악인에게는 악인의 피만 흐른다. 이 분들은 임종 때 손자를 앞에 앉혀놓고 유언으로 “절대 혼인, 사돈은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만, 어떤 분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글로 써 문집에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나 5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그 후손들은 어떠한가.
서양 풍조에 따라 아버지를 용도폐지 하는 시대에 조상이 그런 유언을 남기고 그런 글을 써 문집에 남긴지도 모른다.
알 일도 없고 또 알아도 아무 가치도 없다.
지금 돈이면 전부인 한국의 세계화 글로벌시대에 조상이 설사 그런 글을 남겼다할지라도 역사 왜곡과 또 그런 노예교육으로 정체성을 잃은, 주인정신이 없는 이 나라 후손들은 그때 할아버지는 핫바지로, 지금 세상은 돼지처럼 배만 부르면 되고, 어머니는 젖 값만 지불하면 남이 되는 시대, 지금은 어떤 불의일지라도 그 지위를 가치로 학력과 문벌과 권력과 돈 앞에 무릎을 꿇은 후손들은 우리와 사돈을 맺기를 원하고 있고, 그 앞에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기를 스스로 원하고 있다.
현석(玄石)과 정병주장군.
박정희대통령 시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 중심의 별들이 모여 신군부세력 형성으로 군인의 최고 영예인 ‘별들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였다.
정치군인과 힘의 주류에 달라붙은 그들의 불타는 조국애에 대한 우국충정인 패도(覇道)의 길은 대망의 꿈이 하나하나 차질 없이 비밀리에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괴물보다 무서운 야망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으로부터 저녁초대를 받은 수도경비사령관 정병주(鄭柄宙)장군은 연희동 모 요정으로 가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전 합동수사본부장이 틀림없이 무슨 간곡한 청을 할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동의를 한다. 그리고 쿠데타가 성공하는 날 큰 영화를 누린다!”
“그럴 수는 없다!”
정 장군은 혼자 눈을 감고 머리를 세차게 돌이질 했다.
“시국이 이렇게 돌아갑니다. 장군님은 눈만 감고 계셔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가 비상연락망을 타고 들려왔었다.
김 소령 등 자기의 심복들을 두 번이나 보냈었다.
전두환 사령관의 간곡한 전화가 빗발치듯 왔었다.
“직접 찾아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직접 오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공수단장 때 부사령관으로 휘하에 데리고 있던 상명하복(上命下服)에 충실한 군인정신을 아끼는 후배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나는 군인으로 “하극상은 있을 수 없다” 고 배웠다.
“나는 오직 나라의 명령에만 따르는 군인의 본분을 다할 뿐이다”는 것을 못 밖아 말할 것을 다짐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다음호에 계속>

봉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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