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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봉화, 송이를 버리던 어린 시절

2020년 10월 25일(일) 18:36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박 하 식
소설가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고향에는 오붓한 ‘나’가 있다. 조상님 선산이 있고,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던 수많은 추억이 남아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봉화군봉성면 금봉리304 들목(野木)마을. 뒷산(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가을이 오면 나무 잎이 한잎 두잎 꽃잎으로 떨어졌다. 낙엽 속에는 산송이가 수북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나이 들수록 더 간절하다. 우리 집은 문수산 기슭이었는데 앞개울에는 가재 피리 꾸구리 텅거리 뱀장어들이 우굴 댔다. 쇠죽바가지를 놓고 그냥 주워 담으면 됐다. 조약돌을 들면 가재가 두 세리씩 엎드려 있었는데 큰 놈만 주워 담았다.
버들치 꾸구리 메기 등 순한 고기만 잡고 맛좋은 텅거리는 안 잡았다. 잡다가 쏘이면 손이 텅텅 부어오르며 아파 울어야 했다.
일곱 살 나는 깊은 물에 노니는 뱀장어는 겁이나 못 잡는데,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는 우리 집 검둥이가 컹컹 짖으며 끙끙 앓다가 물에 덤벙 뛰어들어 뱀장어를 물고나와 쇠죽바가지에 담는다. 뱀장어가 꿈틀대는 바람에 쇠죽바가지가 엎질러지고 물고기들이 모래바닥에 나뒹군다. 가제들은 엉금엉금 도망간다.
그래도 좋다. 뱀장어만 들고 집으로 가면 할아버지가 낫으로 뭉텅뭉텅 끊어 쇠죽불에 구워주신다. 먹으면 키가 빨리 큰단다. 맛있게 먹는다. 머리와 꼬리부분은 검둥이가 먹는다.
77년 전, 그렇게 많던 그 개울의 물고기들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없다. 농약이 생기고부터 물고기들은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금봉댐이 준공 된 후 마을과 우리집터는 간곳이 없고 댐 둑 수목 속에 ‘영해박씨세거지비(寧海朴氏世居祉碑)’란 유허비 하나가 흔적으로 서있다.
뒷산에는 산송이가 지천으로 많았다. 송이가 줄로 났다. 검둥이가 온 산천을 뛰어다니며 컹컹 짓는다. 검둥이가 짓는 곳에는 내 팔뚝만한 송이가 불쑥불쑥 솟아있었다. 나는 송이를 따서 바지를 벗어 싼다.
눈만 뜨면 붙어 다니며 너는 아빠고 나는 엄마라며 배꼽으로 우리 아기를 낳아야한다는 동갑내기 옆집 순이는 홑치마를 벗어 가득 싸안는다. 집으로 가지고와서 쇠죽불에 호박잎에 싸서 소금을 뿌려 구워 먹는다. 솔 향이 가득한 송이는 쫄깃하고 달다. 먹다 남는 것은 검둥이에게 던져준다. 널름널름 받아먹는다.
맛이 좋다고 더 달라고 끙끙댄다.
어머니는 송이요리를 안 해먹는다. 남은 송이는 처마 봉당에 그냥 쌓아둔다.
아버지가 처마에 수북이 쌓아둔 산 송이를 자루에 넣어 짊어지고 내성(봉화)장 가는 길에 팔아 내 운동화 한 켤레를 사왔다.
그 운동화를 신고 내년 봄 용머리(용두(龍頭)를 요머리라 했음) 동양초등학교(고꾸민각고)에 입학을 한다고 좋아했다 어머니는 딸 7공주를 내리 낳고 여자로 태어나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범하지 않기 위해 문수산 ‘금봉암(金峯庵)’에 독불을 써 나를 낳았다
그해 가을 저녁 무렵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 가마가 왔다. 가마 뒤에는 의관을 정제한 총각과 상빈이 따랐다. 나를 제일 귀여워하는 속눈썹이 긴 둘째 누이는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 누이는 마당에 상을 펴 물을 떠놓고 청년과 맞절을 했다.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다.
그 이튿날 칼 찬 일본 순사가 팔에 완장을 차고 다리에 개도리를 두르고 몽둥이를 든 두 청년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다.
둘째 누이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없다’고 하자 아버지를 마당에 엎어 놓고 개 잡듯 팼다. 사연은 둘째 누이가 마을 처녀와 같이 일본 공녀(工女)모집에 몰래 신청을 했던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였다.
그것을 안 아버지가 급히 시집을 보내버렸다. 집을 샅샅이 뒤져 누이가 없자 숨겨두었던 놋그릇과 쌀을 압수하고, 마당에 있는 땔 나무가리를 산림법위반으로 적어 가 안동검찰청에서 출두요구서가 나왔다.
어머니는 할머니제사에 제주를 빚었다가 세무서직원이 나와 밀주단속을 했다.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게 하고 벌금이 나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전과자로 호적에 뻘건 줄이 쳐졌다.
몸에 구렁이를 감은 듯 피투성이로 피오줌을 싸던 아버지는 화장실 똥물과 개 잡은 물을 먹고 두 달 만에 일어났다. 그래서 누이 때문에 그 마을에서는 못살고 이사를 떠나야 했다. 영주까지 기차 길은 없었고 신작로는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나는 이듬해 동양초등학교에 입학하려던 운동화를 신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삿짐 소달구지의 뒤를 따라 고향을 떠났다.
순이는 내가 떠나는 것을 보고 죽는다고 울었다.
1945년 해방이 됐다. 그렇게 쉽게 일본이 무너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 1950년 피눈물 나는 동족상잔의 6.25로 의사도 병원도 없을 때였다.
어머니 병이 깊어 둘째 누이가 보고 싶다는 유언을 했다. 친정에는 평생 못 올 줄 알았던 둘째 누이가 젖먹이를 업고 친정에 왔다. 누이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 때, 눈을 떠 누이를 본 어머니는 곧 운명하셨다. 그때 내 나이 9살이었다.
맏누이는 내가 늘 역적(태종 이성계)의 후손이란 법전면 시드물 전주이씨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는 상운면 귀내(龜川)마을 옥천전씨로 출가했다. 아들 둘, 딸 다섯 칠남매를 두었다. 2018년 누이는 95세로 귀천, 선영하에 묻혔다.
2년 후 6.25 참전 독립유공자인 자형이 작고, 국립묘지로 가지 않고 합장을 했다. 그때 누이와 같이 공녀를 신청해 일본군위안부로 간 처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둘째 누이도 공녀로 갔더라면, 그 처녀처럼 돌아오지 못했거나, 이용수 할머니처럼 한 많은 인생을 살았을 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홈페이지 관리자 기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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