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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충효열-12> 인조를 구하려 남한산성으로 달려간 봉화금씨 삼형제

2021년 08월 22일(일) 18:53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상운면 문촌리 기촌마을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문화연구회
기촌基村이라 불리는 상운면 문촌리는 봉화금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쌍령 전투장으로 달려간 금한룡琴漢龍, 금해룡琴海龍, 금막룡琴漠龍 삼형제가 살던 곳이요, 임진왜란 때는 소천면 화장산 전투에서 600여 의병과 함께 산화한 창의대장 류종개柳宗介 장군이 처가살이 하던 마을로 선생의 제당이 마을 어귀 동산에 있다.
금한룡 금해룡 금막룡 삼형제는 적암赤岩 금제순琴悌筍(퇴계문인)의 칠형제 중 끝으로 삼형제 분들이다.
병자호란 때 영남 지방에서 군사를 크게 모집 하였는데, 현감이 공의 형제가 재주와 지략이 있다는 것을 듣고 비장裨將으로 삼았다.
이 일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특별히 부장部將으로 특천하여 전장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한룡이 동생 해룡, 막룡과 함께 어머니 무덤 앞에 가서 통곡하고 상복을 불태우며 “모자의 정분이 비록 돈독하오나 군신의 의리가 또한 막중하옵니다.”라고 고하고 쌍령진雙嶺陳(경기도 광주시)으로 달려갔으나 아군 진영은 이미 함몰된 뒤라 어찌할 수 없었다.
막룡이 도망을 처서 살길을 찾자고 하였으나, 중형 한룡은 “이때는 마땅히 신하로써 죽음을 두려워 할 때가 아니다. 너는 즉시 귀가하여 부모의 제사를 받들라 나는 이미 죽을 결심이 되어있다.”고 하였다.
해룡이 중형의 옷소매를 잡으니 한룡이 칼을 뽑아 자기의 옷소매를 자르고 적진으로 달려갔으며, 이를 본 해룡이 “형이 죽고 동생이 살아남는 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형의 잘린 옷소매를 동생 막룡에게 주고 형의 뒤를 따라 적진으로 달려 갔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형과 함께 전사하였다.
동생 막룡이 형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향리에 돌아와 장사지냈다. 그 후 연유를 갖추어 장문狀聞하니 한룡은 훈련원도정訓鍊院都正에 증직 되었으며, 동생 해룡 은 군기사첨정軍器寺僉正의 직이 내려졌다.

↑↑ 청의 철기군에 무너지는 조선군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1636(丙子)년 청 태종이 조선의 무례한 태도를 문제 삼아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 때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栐)이 급히 군사들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출발하여 쌍령 고개에서 청군과 맞닥뜨렸다.
1637년 1월 3일 청의 척후병들이 조선군 목책에 다다르자 조선군은 곧바로 발포하여 적 척후병의 사기를 꺾었다.
아직 조총에 숙련되지 못했던 병사들이 상당수였던 조선군은 첫 발포에서 소지하고 있던 모든 탄환들을 거의 다 소진해 버렸고, 조선군 진영은 탄환 재보급을 요청하는 수많은 병사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청군이 조선군의 목책을 넘어 급습하였고, 이에 놀란 조선군은 탄약을 다 써버린 조총들을 내던지고 무질서하게 도주하기 바빴다.
허완은 쌍령의 싸움에서 분전 하였으나 패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으며, 민영의 진영은 청군의 공격에 그런대로 잘 대응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탄환 남용을 막기 위해 너무적은 양의 탄환을 분배한 나머지 병사들의 탄환은 순식간에 소진되었고, 탄환과 화약을 재분배 하기위해 진영 한가운데서 탄약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아놓았던 화약이 조총의 화승 불꽃에 닿아 대폭발이 일어났다.
혼란에 빠진 조선군에게 청나라의 팔기군기병 300명이 돌진하여 닥치는 대로 공격하여 순식간에 조선군의 선두대열이 무너지자 대부분의 병사들이 전의를 잃고 우왕좌왕 도주 하다가 밟혀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때 민영도 말에서 세 번이나 떨어져 밟혀죽었다. 허완과 민영의 조선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인조를 구원할 군대는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다.
당시 전투 병력은 조선군이 8천에서 3~4만명, 청군이 300명에서 6천명 등 여러 기록들이 있는데, 실제로 투입된 병력은 조선군 8천명, 청군 기마병 300명이 맞는 듯하다.
이로써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티던 인조는 결국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다.
쌍령전투는 청나라 기마병에 의해 농민군이나 다름없는 급조된 조선 근왕군이 대 참패한 전투로서 정유재란시 원균의 무모한 전투로 참패한 칠천량해전, 6.25전쟁시 한국군전시작전권 이양의 빌미를 제공한 현리전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패전敗戰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홈페이지 관리자 기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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