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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 (41) 저수지에 잠겨버린 애잔한 마을, 애전(艾田)

봉화문화연구회 배 용 호

2019년 03월 31일(일) 15:07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애전마을의 위치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무위정사 원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물빠진 오전 저수지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서암종정이 기거하던 무위정사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현재의 무위정사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선달산(1,236m) 아래 지금은 오전저수지가 들어서 있다. 1995년의 일이니 벌써 20년을 훌쩍 넘긴 셈이다.
이른골, 잿밭을 합해 20여 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던 산골마을 애전(艾田)이 있었다.
그해 집과 농토를 모두 물밑에 밀어 넣은 애전마을 사람들은 뒤를 고향을 뒤로하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그나마 여덟 가구는 봉화의 안동통로 진출입로인 4차선도로 다릿발 밑 소위 ‘새마을’이란 곳으로 옮겨 앉아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다.
공단주유소 건너편 양평해장국 마을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웃고을로, 또는 아예 먼 곳으로 떠나버리기도 했다.
20년이 넘었다지만 가슴 속은 늘 애잔한 맘이라는 이주민 김동규(72세) 씨는 가끔씩 예전에 살던 애전마을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난다고 한다.
애전은 보부상(褓負商)들이 지나다니던 길섶마을이기도 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었다. 산짐승들도 백두대간을 넘었고, 인간도 생존을 위해 길을 만들었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가족을 꾸릴 여유도 없이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던 보부상들은 몇 푼어치 벌어들인 돈으로 요소요소에 땅을 사 두었다.
혹시나 모를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의리는 거기까지였다. 교통이 발달하고 상설시장이 생기면서 이들이 설 자리가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애전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남았던 이들 보부상 12명의 애잔한 삶도 대신해야 했다. 그들을 위해 제사도 지내주었다.
저수지 북단에는 오전2리 주민들이 2009년에 세운 보부상위령비가 있다. 위령비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던 보부상들의 영령을 추모하는 위령비다. 비문에 있는 보부상들이 전 재산을 투자해 오전리 애전 마을에 토지를 구입해 농사지으며 살았다. 그들이 죽으며 그 토지를 마을에 희사했고, 마을에서는 그들의 뜻을 기려 매년 9월 말일 그들을 기리는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그러다 1995년 물야저수지가 생기면서 그들의 묘가 수몰되었고, 이곳에 제단과 위령비를 세워 그들의 고마운 뜻을 기리고 있다.”
위령비에는 이들 보부상단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정확한 이름도 있지만 상당수는 등금쟁이들의 이름을 몰라 권울산 박제천 등 성씨에다 지역명을 조합해 새겨진 이름들이다.
오전약수탕을 중심으로 하는 오전2리 주민들은 매년 음력 9월말에 이들을 위한 위령제를 올린다. 또한 매년 4월 초파일에 박달령 서낭당에서 올리는 고사(告祀)가 바로 이들 보부상을 위한 고사라고 한다.
옛날 생존의 이 길은 지금 이야기가 있는 둘레길이 되어있다. 박달령과 오전약수탕은 <외씨버선길>이 지나는 길목이다. 박달령에서 내려오면 오전저수지에서 보부상위령비와 만나고 여기서부터는 <소백산자락길>과 동행하여 남대리로 가는 늦은목이재를 넘게 된다.
보부상위령비를 지나면서 산 중턱을 올려다보면 햇볕을 쬐고 있는 서암(西庵) 큰스님의 토굴 무위정사(無爲精舍)가 보인다.
자연인 송홍근(宋鴻根-법명 西庵)은 1914년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에서 태어난다.
부친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집안이 몰락해 소백산 화전민촌을 전전하면서 과히 유랑생활을 했다. 일여덟 살 때 쯤 대강면 올산마을서당, 대강보통학교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배움 길을 열었고, 예천으로 와서는 대창학원 급사로 일하면서도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열두서너 살 때쯤 예천읍 뒷산 서악사(西岳寺) 스님에게 빌어 3년간 머슴살이를 조건으로 출가를 하락 받는다.
송홍근 소년은 그렇게 산문(山門)을 열었다. 일본 유학시절 신문배달, 치과조수, 고물장수, 짐꾼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부자 밥 먹듯 굶는 사이 육신은 깊이 병들어갔다. 결국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귀국하지만 죽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 그는 다시 문경 김용사 선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강산, 백두산을 거쳐 다시 문경 천연동굴에서 성철(性徹)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했다. 남북한을 통 털어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 각처를 샅샅이 다니며 수행하자니 당연히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납의(衲衣) 한 벌만으로 천하를 주유한 셈이다. 그러는 동안 봉암사를 한국불교 선풍의 본원지가 되게 했고,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이 되게 했다.
한국 최고의 선승(禪僧), 출가수행자의 사표, 추상같은 법도의 대종사 등 온갖 수식어를 염주처럼 달고 다니지만, 당신은 늘 감투가 거추장스러웠다.
1975년에는 조계종 원로회 의장으로서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추대하고는 곧 바로 토굴로 돌아갔다. 1993년 자신이 종정을 추대 받았을 때도 넉 달 만에 사임하고 다시 토굴로 숨어들었다.
그 때 숨어든 토굴이 소위 ‘태백산 토굴’로 통하는 오전저수지의 초라한 암자 ‘무위정사’이다.
그는 이 조립식 건물에서 무려 7년간 무위자적(無爲自適) 했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사의 보금자리치고는 너무나 초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2003년 3월 29일 세수 90세의 서암 종정은 그의 토굴 무위정사(無爲精舍)처럼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 애전마을이 물에 잠기듯 그렇게 갔기에 애잔하기가 마찬가지이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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