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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42)‘잠자는 마을’… 봉성면 봉양리 고지바우

2019년 04월 07일(일) 14:17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봉화문화연구회 박 대 훈

↑↑ 고암동 마을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고지바우 마을안내 표지판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을입구 바위.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상운 소재지에서 봉성 쪽으로 봉화금씨 집성촌인 문촌을지나 봉양 땅에 들어서면 몇 집이 길가에 보이고 거기서 고개를 좌측으로 돌리면 들 건너편느티나무 숲속에 집 한 채가 보인다.
오늘 찾아가는 고지바우 마을의 문지기 같은 옆모습만 보이는 이층집이다. 이내 나타나는 철판에 고지바우라는 허름한 입간판이 도로가에 서서 안내를 한다.
봉화에서 봉성을 거처 내려오면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아마 거리상으로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다. 거기서 마을 진입로격인 농로를 따라 들을 건너면 아까 보이던 그 이층집 앞을 지나게 된다. 그 집은 농가 같지는 않다.
그 집 축대 앞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4-H마크에 “메아리 새마을청소년회” 글씨가 쓰여 있다.
어릴 적 농촌에 젊은이 들은 많고 배움이 그립던 시절 열심히 활동하며 몰려다니던 일들이 그림같이 지나간다.
클럽 명으로 보아 우리가 하던 시절의 조직은 아닌 것 같고 근년에 있었던 것인 듯싶다.
거기서 조금 들어가니 마을이 양쪽 계곡을 타고 길게 늘어져있고 겉보기와는 다르게 제법 넓은 편이다.
마치 장구를 연상케 하는 지형이다. 이층집 있는 지점이 장구의 잘록한 부분쯤 된다.
입구의 이층집을 제와하면 마을 안은 온통 회색빛이다. 가끔 자동차가 서있는 집들이 보여서 그렇지 70년대를 거슬러 들어온 느낌이다. 느낌대로 마을엔 귀농(귀촌)자가 한집도 없다고 한다.
그분들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지만 그중에서 농촌 주거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은 그들의 공로라 하겠다.
삼월 말 봄날이지만 꽃샘추위 날씨라 그런지 밖에는 사람들 흔적하나 보이지 않는다.
발길 닿는 대로 한집을 찾아들어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른 후에야 낮잠에서 깨어난 주인이 눈을 비비며 나온다.
임정차(77세)라고 나이를 물으니 칠땡 이라며 이집 안방에서 태어나 사랑방에서 살고 있다는 그는 군에 간 것 외에는 죽 이집에서 살았다고, 그런 사람 혼자뿐이라고 한다. 내가 반장을 30년 했다. 아직도 반장이다. 여기가 많을 땐 숲 안으로 60호가 살았다. 그때는 여기가 원둔4리 였는데, 지금은 봉양 2리로 모두 14집이다. 이쪽이 7반 일곱 집 저쪽 골이 8반 일곱 집, 그러고 보니 양쪽 반이 똑같네 하신다.
두 반 합해도 열넷 집밖에 안 되는데 행정의 비효율이다.
1996년 발행된 봉화의 촌락과 지명에는 31가구가 살고 있다고 되어있다.
그는 집 앞 논을 가르치며 여기도 집터, 저기도 집이 있었다고 팔을 이리저리 휘졌는다.
왜? 고지바우라 하느냐?
들어오다 보면 이층집 앞에 바위가 서 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는 것 같다.
고지(박)같이 생겼다고 해서, 높을고, 바위암, 고암동이다. 돌아 나오다 다시 봤는데 위에가 평평한 것이 고지같이 생겼다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는 우리가 어릴 때 바위에 올라가려면 다른 아이가 받쳐주어야 올라 갈수 있었다고 했다. 당시엔 꽤 높았는데 길을 내면서 성토가 되었는 모양이다.
그는 길이 전에는 바위 뒤로 나 있었고, 그 앞에는 웅덩이(작은 연못)가 있었는데, 스님이 바위 위에 앉아 책을 읽던 중 졸다가 떨어져 웅덩이에 빠져 죽어 웅덩이를 매우고 그리로 길을 내었다고 한다.
마을 앞 느티나무 숲이 좋아서 거기서 많이 모여 놀았는데, 나무가 엄청 커서 서넛이 안아야 될 정도였다. 봉화 있는 심동국이라는 사람이 배 만드는데 판다고 베어갔다.
성황당도 거기 있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미신타파 한다고 없앴다. 어릴 적 여기 양반이 이필동 어른하고 박씨 둘이서 글을 가르쳤다. 류창준이란 풍수도 있었는데, 그분 돌아가시고 부고를 전하려고 내가 많이 다녔는데 배가 고파서 혼났다.
논둑 바르는 사람한테 전하러 갔는데, 배고픈 참에 농주(농가에서 담은 막걸리)를 한 사발 주는 걸 얻어먹고 술이 취해서 혼이 났다. 그때가 17세 쯤 됐을 때이다.
옆 골인 8반, 그중 나이가 많다는 박분옥(82세)할머니 집을 찾았다. 집은 마을 뒷켠에 있었다.
안에서 tv 소리는 왕왕 나는데 대답이 없어 혹시 하고 문을 열어보니 귀가 어두워 앤간 한 소리는 안 들린다고 한다. 그러나 대화는 가능했다.
기름 아끼느라 방안 공기는 냉냉 한데 침대엔 전기장판이 깔려있다. 침대 옆 종이상자엔 약봉지가 그득하고, 의자엔 공공근로 유니폼이 걸려있다. 내일부터 나간다고 한다.
바닥엔 새 전화기가 놓여 있길래 물어보니 얼마 전 소방서에서 설치해 줬다며 화재, 구급, 보호자를 호출할 때 이렇게 누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 주신다.
친정은 봉양리 큰 동네로 19세 때 당시 나이로는 늦은 나이인데, 집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못 다녔고 거기다 아부지가 노름을 해서 더 어려웠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는 짚신을 신고 자랐고, 시집올 때 흰 고무신을 신어봤다.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이 군에 가서 사고를 당하여 왔다.
처음엔 내가 알면 도망이라도 갈 가봐 쉬쉬하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군에서 세 사람이 나무하러 갔다가 맨 앞에서 지뢰를 밟아 무릎아래 한쪽다리를 절단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후로는 아이들이나 손자들 보고도 무슨 일이든 절대로 맨 앞에 서지 말라고 당부를 한다. 그런 와중에 아들4형제 딸 하나 5남매를 혼자서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 했다.
별 맘이 다 들었지만 아이들 땜에 어쩔 수도 없었다. 지게를 하도 많이 져서 허리를 못 쓴다.
하늘 땅 밑에 나만큼 고생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울었는거 말도 못한다. 어이 그리 살았는지 꿈만 같다. 시어른들이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한 살 더 많은 남편은 69세 때 돌아가셨다. 남편 제대 후 상이용사보상금 타 먹으려 많이도 쫓아다녔지만 돈만 날렸다. 탈영병으로 되어있더란다.
다행히 아이들은 모두 착하여 그것들 보고 산다.
제사도 저희들 있는데로 가져가라니까 엄마계실동안은 여기 와서 지낸다고 써운다. 왔다가 밤에 간다. 제사 가져가면 엄마가 서운하고 여기 올 일이 더 없어진다고 말 안 듣는다. 벽에는 팔순잔치 때 찍었다는 전 가족사진이 걸려있다.
애들한테 늘 일러요. 마음을 잘 써라 먹을 것도 나눠먹고, 맨 날 그리시킨다. 사람이 악하게 살면 악한 죄가 돌아간다. 후하게 살면 뭐가 되도 된다.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있자니 내로라하는 강사의 강의보다도 더 가슴이 저려 온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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