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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22> 쌍샘의 마을 물야면 샘실

봉화문화연구회 이 기 락

2018년 11월 04일(일) 22:02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을 입구에서 본 샘실 마을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샘실마을의 상징 쌍샘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장정 두 아름이나 되는 샘실 마을보호수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샘실 마을은 물야면 두문 1리로, 북쪽 산 넘어는 압동리 사골이요, 서쪽 산 넘어는 압동 조양리요, 동쪽은 만석산, 남쪽으로는 매봉산이 보인다.
<봉화군지>와 <奉化의 村落과 地名>에 따르면 ‘성주 배씨 선조가 개척한 것이 시초인데 쌍 샘이 있어 물맛도 좋고 피부병에 효과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고 전해진다.
지난 태풍 콩레이가 지나간 후 피해가 심한 친구 사과나무 세우는 일을 도와주고 가을빛으로 물든 들판을 보며 샘실 마을을 찾았다.
물야면 소재지 직전 만석산을 왼쪽에 두고 오록리 산운 마을 앞의 포장길을 따라 1Km쯤 올라 작은 재를 넘으니 두 갈래 길이 나오고 오른 쪽 길로 들어서 다시 1Km쯤 아래로 내려가면 좁은 도로 끝에 샘실 마을을 만난다.
또한 가평리에서 이애재를 넘어 두문리로 가는 길 우측 양지바른 산 밑에 샘실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앞서 말한 길은 물야면 소재지로 가는 길이라면, 나중에 말한 길은 외지로 나가는 진입로이다.
마을 노인 회장을 맡고 계신 배장규(82) 어른을 찾아뵈었다. 바쁜 중에도 커피를 내 오시며 이것저것 말씀해주신다.
“쌍 샘은 원래 하나가 있었으나 동네가 커지면서 물이 더 필요하여 그 옆에 하나를 더 팠다고 들었네요. 옛날에는 모두 샘물을 길러다 식수로, 생활용수로 썼으나 간이 상수도가 들어오고부터는 샘물을 쓰지 않으니 왼쪽 샘은 모래가 쌓여 있고, 오른쪽 샘도 물만 고여 있지요. 위치는 저쪽 새로 지은 집 옆이고요” 하신다.
마을 뒷산 비석이 서있는 묘소에 대해 물으니 “제일 위는 9대조 치암(癡岩) 조부 산소고요, 그 아래는 샘실 입향조인 8대조 유암(楡岩) 할배 산소지요. 아랫 샘실 태규 형님을 찾아가면 많이 아시고 잘 가르쳐 줄거요.” 하시며 바쁜 표정 같기에 인사를 하고 뒷산 묘지로 올라갔다.
“崇禎處士通訓大夫 司憲府執義 楡巖星州裵公 諱幼章 配淑人醴泉權氏之墓”(숭정처사 통훈대부 사헌부집의 유암성주배공 휘 유장 배 숙인 예천권씨 지묘)라 묘비가 쓰여 있으니 이분이 바로 샘실 마을 개척자이신 모양이다. 멀리 남으로 매봉산이 보이고 동네 집들도 잘 보이는 위치다.
배장규 씨가 찾아보라던 이 마을 제일 어른이신 배태규(94) 어른 집을 찾으니, 당호를 원천재(源泉齋)로 쓰고 있었다. 어른은 그 연세에 아직 출입을 하시는 모양으로 건강하신 모습이다. 또한 어른은 작고하신 선친의 친구 분이라 반갑게 맞아 주시며 족보를 보여주고 안촌선생 문집 해설 책도 한권 주신다.
선조와 샘실 입향에 대한 물음에 들려주신 내용을 정리해 보면 9대조인 치암(癡岩) 배상익(裵尙益)(1581~1631) 공은 1625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전라도사(都事), 황해 도사를 지냈고, 진주판관에 배수되어 부임 하던 중 51세로 운명하시었고, 작품으로 <치암집>이 있으며 부친은 나주목사를 지낸 안촌(安村) 배응경(裵應褧)(1544~1602)공으로 성주에서 태어나, 33세 문과 급제하였고 사헌부감찰, 공조정랑,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청도군수로 큰 활약을 하고 공을 세웠다. 50세(1593년)에 영주로 거처를 옮겨와 퇴계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고 1602년 2월 59세로 일기를 마쳤으며 남긴 문집 <안촌집>이 있다. 사후 형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치암(癡岩)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맏아들은 유화(幼華)로 호는 팔사(八 斯)이며 도사(都事)를 지냈고 물야 사곡(沙谷) 동네에 정착, 둘째 아들 유장(幼章)(1618~1687)은 호가 유암(楡岩) 이며 詩文에 능했으나 벼슬길에는 큰 뜻이 없었고 샘실에 들어와 정착한 성주배씨 샘실 입향조가 되신다.
유암(楡岩)공은 조부와 부친 두 분의 덕을 숭상하고 기리기 위해 사당과 유암정(楡岩亭), 봉계서원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치며 살았다. 대원군의 서원 철패 시 모두 훼철되고 사당과 유암정 모두 소실되어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성균관유도회 물야면회장을 지낸 장원식(88) 어른을 뵈니, 반갑게 맞아 주신다. 중국 송대의 대 유학자 회암(晦庵) 주희(朱熹) 선생의 ‘涵養天機’(함양천기)라는 친필 탁본 액자가 벽에 걸려있다. 힘 있는 해서체로 “스스로 인격을 함양해 놓으면 하늘이 쓸 기회를 준다.”라는 뜻인 것 같다.
“방조(傍祖)이신 북계(北溪) 장복한(張復漢) 선생이 샘실에 살았던 연고로 증조부 때 샘실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으며 현재 샘실에는 인동장씨가 5가구 살고 있네” 하신다. 또한 “세무 공무원으로 이사관을 지낸 맏아들 성섭이를 비롯해 서기관, 사무관을 여럿 배출하였고 자식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살고 있네” 하시며 은근 집안 자랑도 하신다.
“쌍 샘 옆에 큰 향나무가 사라진 것도 참으로 아쉽네. 이제 저 언덕 위 노송(老松)이 동수(洞樹)로 마을을 지켜 주네” 하신다.
샘실은 윗샘실, 아랫샘실로 윗 마을은 인동장씨, 아랫 마을은 성주배씨가 주로 살았으며 지금은 두 마을 합해 성주 배씨 5가구, 인동 장씨 5가구, 조씨 2가구 등 23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중 귀농 귀촌 가구도 6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본 필자의 소감은 마을 역사를 간직한 쌍 샘의 복원 관리가 아쉽고, 200년은 넘음 직한 노송(老松)도 동수(洞樹)로 잘 보존하고 가꾸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봉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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