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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23> 성황당 없는 석포3리 성황골 마을

봉화문화연구회 박 대 훈

2018년 11월 11일(일) 13:25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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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당 조사차 나선 길에 길 표시 안내판에 성황골길이란 안내판이 보여 자료에도 없는 안내판 화살표시를 따라 석포3리 성황골을 찾아들었다. 석포면 소재지 진입로를 따라가다 왼쪽에 놓인 잠수교를 건너면 마을 안내판이라고 하는 것이 길옆에 서 있는데 좀 낡았다. 몇 년 전인가 탐방로 개설이 전국적으로 바람을 일으킬 때 탐방객을 위한 시설들을 남들 따라 한 모양이다.
몇 걸음 더 가서 철교 밑으로 난 개구멍 같은 길을 통과하니 “자전거도로 시작, 종점까지 4km”라는 안내 글이 작은 나무판에 궁색하게 쓰여 있다. 거기서부터 작은 개울 옆으로 아스팔트 진입로가 따라 가고 있는데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들어가니 겨우 몇 집이 보인다. 산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짐을 지고 이등저등 넘기가 힘드니 농토 가까이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울을 따라 난 자전거 길을 죽 들어가니 자전거 대여 장소가 있는데 자전거는 보이지 않는다. 거기서 얼마를 더 들어가 마을 끝 지점까지 가니 족구장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용하는 흔적은 없다.
다시 내려와 마을 언덕바지에 사시는 얼마 전까지 문화원 이사를 했다는 김기석(75)씨를 만났다.
그는 여기서 태어나 여태 살고 있다면서 여기는 마을 입구가 좁아 외부에서 보면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아 6.25 때도 피해가 없었다.
지금도 그런데 당시에야 오죽했으랴 싶다. 또 다른 진입로인 성황골 길은 영암선 개통으로 폐쇄되었다. 모두 14가구인데 귀농인은 한집도 없고 전부 각성이 산다.
농사는 무, (양)배추, 감자, 옥수수 등을 심는데 올해는 대체로 무 농사를 지었다. 집에서 바로 보이는 건너 산에 납석광산이 있는데, 지금도 조금씩 하고 있다. “봉화의 촌락과 지명”이란 책에는 “여기를 성황곡이라 하는 것은 조선 중기 때 김참판이라는 사람이 낙향하여 단종의 애사를 슬퍼하여 원혼을 달래기 위하여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 제단 앞의 경치는 성과 같고 나무의 모양새가 제단을 향해 고개를 숙여 섬기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성황곡이라 불러졌다. 1976년부터 납석이 발견되어 연간 3천 톤이 생산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포천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진입로였던 성황골이라고 하는 그 제단이 있다고 하는 대로 가보니 좁은 계곡에 통행이 없어 길은 거의 없어졌고, 무슨 나문지 키 큰 고목이 도랑가운데 서있고 주변축대도 떠내려갔는지 거의 없어 제단이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당초 나무는 죽고 옆의 싹이 새로 돋아난 것이란다. 그분 말로는 안 모신지 3~40년 되었다고 하니 그럴만도 하다. 성황당에 대해서 잘 안다는 계곡 아래쪽 철뚝가에 사시는 김월매(89)할머니를 찾았다.
“봉화서 왔는데요, 월매씨 맞지요? ”
“세상에 내 이름을 어떻게 아노!” 이름이 특이하여 외우기도 쉽지만 그 한마디에 경계심이 풀려 대답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맏딸로 15살에 시집왔는데 가마채를 여기 툇마루에 걸치고 들어왔다. 그때 처녀 공출이 심할 때라 아부지가 일찍 시집보냈다. 그런데 시집와서 보니 남편이 보국대 영장을 받아놓고 있더라. 결혼 후 며칠 안 돼서 갔다. 해방이 되어서 3년 만에 왔는데, “인제 오니껴? 하며 나도 모르게 뛰쳐나갔다. 시어른들이 보니 제일 먼저 뛰쳐나가더란다. 남편은 내가 친정으로 갔는지 알았다고 했다. 그 사이 친정모친이 돌아가시고 5남매를 아부지 혼자서 키우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남편은 다시 군에 가서 6년을 있다왔다. 제대하고 4남매를 연년생으로 놨다. 영감 군에 가고 그사이에 황지 있는 분한테 무당을 배웠다. 무당 굿하는 게 보기 좋아서 따라 다니다 보니 무당이 됐다. 영감님은 아무 말 안 했다. 내가 글은 몰라도 문서가 무당보다 났다. 저 산골에 있는 성황당도 동네서 모셨는데, 우리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안 지낸 지 오래됐다. 지금도 영주 등 먼데 사람들이 와서 기도한다. 내가 거들어 줄 때도 있다. 거기 외에도 우리는 집 옆에 따로 모시는 데가 있는데, 우리 성황당은 내가 시집오기 전부터 모셔오던 것인데, 내가 죽으면 모실 사람이 없다. 전에는 큰 개두릅나무였는데 죽고 그 옆의 나무를 모시는데 무슨 나문지는 모르겠고 봄에 꽃이 핀다. 나는 성황당만 믿고 살았다. 동짓날가고 정월초하루 보름에 가고, 멀리 갈 때도 술 한잔 붓고 “성황님 곱게 곱게 봐 주이소, 집에 올 때까지 아무 탈 없게 다녀오게 해주이소. 하고 기도하고 다녀왔다. 산나물 뜯으러 갈 때도 첫 번째 뜯은 나물을 신문을 깔고 쏟아놓고 산신께 제를 올리고 나면 깊은 산에 혼자 다녀도 무서운 줄 몰랐다. 이런 날은 뱀 새끼 한 마리 안 만난다. 성황님 외에는 아무것도 믿을게 없다. 웃대 어른들 하던 대로 따라만 하면 된다. 도적질과 서방질 안하고 다 해 봤다. 장사하러 멀리 가도 꼭 집에 와서 자고 조석을 해 드렸다. 그날 번 돈은 영감한테 보고하고, 많이 번 날은 업어 달라고 하면 언나 냐? 했지만 마음은 안다. 그런 영감도 바람이 났다. 내가 찾아가서 영감 앞세우고 마당에 메여있는 소도 한 마리 몰고 왔다. 시어른이 같잖아서 웃었다. “세상에 우리 며느리 같은 사람 없다”고, 영감이 마늘을 놓고 있는데, “여기서 뭣 하는 짓이냐? 집에 어른은 누가 모시고, 아이들은 누가 키우라고 하는 짓이냐 얼른가자 앞 서거라” 하니 순순히 따라나서더라. 우리는 천하의 배필이다. 살아오면서 야단 한번 안 맞았다. 어른들도 그랬다. 그의 이어진 얘기는 끝이 없었다. 사람들의 믿음은 맹목적이고 막연한 데가 있다. 그것이 참 믿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봉화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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