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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 (54) - 오지중의 오지마을 법전면 눌산2리 마너무

봉화문화연구회 강 필 구

2019년 06월 30일(일) 15:12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너무 마을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을로 들어가는 건널목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김욱호 어르신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마을 앞의 서낭당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36번 국도는 봉화군을 동서로 가르고 울진으로 나간다. 덕분에 봉화의 곳곳이 국도와 가까워졌는데 그 가운데 법전이 있으니 법전은 교통의 혜택을 잘 받는 곳이다.
36번 국도변의 녹동역을 지나면 노루재 터널로 올라가는 길과 영양으로 나가는 31번국도가 갈라진다.
그리고 바로 ‘부트내’ 마을이 나오고, 눌산2리 입석 이정표를 따라 녹동역에서 임기역으로 가는 영동선 철도 건널목을 지나고, 입구에서 2㎞를 올라서야 ‘마너무’ 마을입구가 보인다.
오르막이 심해서 입구에서도 마을을 전체적으로 볼 수가 없다. 먼저 서낭당이 길손을 맞고 왼쪽 길 아래 개울가에 위치한 서낭당은 잘 꾸며놓았다. 바위며 나무들이 예사롭지 않다.
오래됨직한 우람한 소나무 숲과 느티나무와 교목들이 어우러져 서늘하고도 운치가 있고 주변에 쉼터를 조성하여 여름에 더위를 식히기에 좋아 보인다.
마너무마을은 전체적으로 해발550m의 높은 터에 올라 앉아 월암산 뒤편에 위치해서 정남향인데, 산 건너편에서 월암산을 바라보는 집들은 종일토록 햇살을 잘 받는 양지이고, 입구에서 들어가는 길은 오르기도 하고 돌기도해서 별천지를 보는 듯 숨은 모습이다.
마을길로 몇 집을 지나쳐 마을 노인정을 옆으로 돌아 김욱호(78세)씨 댁을 찾았다.
약간 불편한 몸으로도 반가이 맞아주어서 편안히 추억을 묻고 이야기 나누었다. 몸은 불편해도 정신이나 목소리는 정기가 넘친다. 이 마을은 1796년에 진(陳)씨 선비가 처음 입향해서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말의 모습을 보고 ‘마너무’라고 했다는데, 김욱호씨의 의견이 궁금했다.
“언제부터 사셨는지 기억하세요?” 한참동안 기억을 더듬어 “내가 열아홉 살에 들어왔어. 여긴 내가 태어난 고향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와 조상들의 고향이지. 고조부 산소를 모시고 있으니 입향이 오래된 의성김씨 집성촌 이었어.”
“아버지는 일곱 살에 정말 먹을 게 없어서 할아버지를 따라 이 첩첩산중을 떠나 현동으로 철암으로 나가서 억척스럽게 살아낸 거지. 해방을 갑자기 맞은 그 시절은 질서도 없었고, 먹을 것도 없었어. 배고프니 무슨 일이든지 했고, 힘센 놈이 빼앗고 모진 놈이 잘살았던 시절이지.” 그렇게 어렵고 배고프던 아픈 기억을 긴 한숨으로 대신한다.
그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요령이 지금도 우리 삶에 녹아 있나보다. “가난도 가난도 말도 마! 입에 풀칠할게 있어야 살아내지! 지금 아프리카 소말리아를 보면서, 그때 우리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어. 정말 기맥힌 가난이여!”
1960년대 초반에는 마너무에도 50여 호가 살았고, 너무 터전이 좁으니 산이 험해도 골짝마다화전으로 개척해서 밭을 일구고 좁은 터라도 서로 나누어 살았다.
그러다가 새마을 운동으로 길을 내고 집을 고치고 다리를 만들면서 마너무도 엄청난 변화의 물꼬를 텄다.
그 전까지 운송수단은 지게로 져서 나르는 것이 유일했고 그 지게길이라도 풀 베고 유지하는 게 전부였다.
“마을 유래는 어떻게 들었어요?”하고 물었다. “모두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뒷산에 진(陳)씨들 산소들이 남아있고 아주 잘 살았었다고 해. 옛날에는 거지들이 너무 많아서 이 마을까지 얻어먹으러 몰려왔는데, 그게 싫어서 늘미에서 넘어오는 문고개에 돌로 성을 쌓아서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고 하는데, 그 뒤로 잘살던 진씨들이 인정이 메말라 망해서 흩어지고 이제는 한 집도 남아있지는 않지. 그게 사람 사는 교훈인거 같애.”
마을이름은 이렇게 들었단다. “마을 앞산의 생김이 말이 네 다리를 뻗고 편히 쉬는 모양이라 마너무라고 했다는 이야기와 위에서보면 이 마을이 매화꽃 한송이가 땅에 떨어진 ‘매화낙지(梅花落地)’형상으로 모든 산자락이 매화꽃잎으로 마을 가운데 꽃술을 보호하는 형국의 길지여서 어른들이 매산동(梅山洞)으로 불렀고, 밖에 사람들은 산너머 매산동이라해서 ‘매너머’라 부르다가 마너무가 됐지”
김욱호씨는 매화낙지의 꽃술에 본인이 거주한 뒤로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마너무는 고지인데도 남향이고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온건하다.
말의 쉼터로 매화낙지의 길지로도 손색이 없다.
내친김에 마을의 골짜기를 물어본다.
오랜 시절 어려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여 화전으로 개척한 골짜기는 월암산을 강산이라 하고, 그 비탈을 경상도 방언으로 ‘강산삐아리’라고해서 산에 붙은 비탈 밭과 낮은 능선 너머에 있다고 ‘질근너머’, 돌아앉아 있는 골이라고 ‘도롱골’, 우묵한 터밭이라고 ‘텃골’, 닭을 닮은 바위가 있는 곳이라고 ‘달개바위’, 능선이 널찍한 ‘능한’, 경사가 심한 밭인 ‘섯밭너매’, 긴 밭 뒤의 골이라고 해서 ‘뒨디밭골’. 이런 우리말 이름들이 아직 그대로 쓰이고 있는 외딴 곳 마너무에는 네 개의 관문이 있어서 ‘사대문’이라했다.
사대문은 네 개의 고개인데 늘미에서 들어오는 ‘문고개’, 녹동으로 나가는 ‘장고개’, 소천 현동으로 나가는 ‘수리고개’, 명호로 나가는 ‘수터고개’로 모두 높은 고개를 통해야 마너무로 들고 날 수 있었다.
1970년대가 되어서야 차가 다니는 길이 열리고 길은 사람들에게 사는 지혜를 전달하여 새 길을 깨우쳐 주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무지 존경해. 배고픈 민족의 서러움을 해결해주고 나라의 질서를 잡고 잘 사는 법을 일깨워줬잖아?”
김욱호씨는 배고팠던 어린 시절의 뼈아픈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50여 호의 마을은 의성김씨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모두 나가서 자기 살 곳으로 가고, 현재 22가구의 마을에는 두 가구의 일가만 남았다고 속상해 한다.
마을 앞 서낭당이 궁금했다.
“서낭당에 제사는 올려요?” 하고 물으니, 조금 속상해 한다.
“서낭당은 1970년대에 정부에서 미신타파 한다고 서낭당 철거명령이 내려왔을 때, 서낭신에게 나라 정책으로 철거한다고 고하고 철거했지. 그 이후로는 당집만 보존할 뿐 제는 지내지 않아.” “그러면 당집도 철거하지 그래요?” “당집마저 철거하는 건 너무 안타깝기도 하고, 다른 마을에서 당집을 철거한 뒤 마을에 우환이 자주 있어서 마을의 안녕을 위해 보존하지 않을 수 없어.” 옛날에는 고사 열흘 전에 유사를 뽑고, 제관이 집집마다 기원 소지를 올리면서 축원과 안녕을 빌고 마을 고사떡을 나누면서 공동체의 의지를 만들어 나갔단다.
이런 산비탈의 농지에는 경작할 마땅한 작물이 없어 감자, 고추, 담배, 수박 같은 특용작물이 재배되고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산지라 송이와 능이 같은 귀한 버섯과 산나물이 지천으로 나고 이제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김욱호씨는 마을의 내력을 잊지 않고 어른으로서도 강상이 살아있는 마을로 지켜가고, 마을의 회의나 모임에서 옛날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지켜왔던 공동체의 마을 질서를 지금에도 유지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다고 한다. 다행히 젊은 사람들이 그 뜻을 존중하고 잘 따라주어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마너무는 참으로 오지다.
어디로 나가도 요즘 흔한 신작로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자연의 의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자연 그대로의 혜택을 간직하고 사는 곳.
이제야 사방으로 길을 내어 소통이 쉬워졌지만, ‘매화낙지’의 길지는 마너무의 자랑이자, 새로운 마을 공동체의 두레정신을 잘 이어가는 멋진 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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