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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 (60)- 중석광산으로 명성 떨쳤던 소천면 옥방(玉房)마을

봉화문화연구회 방 유 수

2019년 08월 18일(일) 16:36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폭구소(沼)가 있는 옥방마을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옥방 약수터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옥방(玉房)마을은 봉화에서 36번국도를 타고 울진방향으로 가다가 울진 경계를 잠간 넘어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리 울진경찰서 광회파견대 가 있던 건물을 지나면 옥방마을 이정표가 서있다.
이 곳을 지나 옥방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봉화군 소천면 분천5리 옥방마을이 나온다.
옥방은 우선 보기에는 한 지역으로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옥방천을 가운데 두고 봉화군과 울진군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옥방으로 통한다.
옥방 마을은 기록에 보면 1913년 옥석을 발견하면서 옥방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 중석광산이 개발되면서부터 외지에서 몰려든 광부들과 식솔들로 한때는 1,200세대가 넘는 도시마을이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면 마을 초입 도로변 좌측에 옥방광업소 종업원들이 건립한 정완규선생 송덕비가 있다.
정완규 선생은 중석광산에서 노다지 광맥을 많이 발견하여 종업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마을에 들어서면 마을회관을 겸한 구판장이 있고, 옥방교회가 있다.
마을회관 자리에는 예전에 경찰관 1명이 근무하는 봉화경찰서 옥방파견대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도로변 양편으로는 광산이 한창 될 때 지었던 광산촌 가옥들이 남아있어 번창했던 시절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옥방광산은 중석(重石:텅스텐)·금·납·아연 등이 생산되었으며 1939년 금은광산으로 설정 등록되었으나 1941년에 다시 중석광산으로 개발되어 일제강점기부터 백중석을 채광하여 왔는데, 옥방광업주식회사가 생산한 백중석은 양적으로 상동광산에 버금갈 뿐만 아니라 그 질에 있어서도 전국 제일이었다 한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전쟁물자로 사용되면서 각광 받아서 해방이후 밀매방지를 위해 미군 1개대대 병력이 들어와 근무하는 초소가 4개나 있었다고 한다.
한때는 하루 처리 60t 규모의 선광장(選鑛場)이 있었으며, 1950년대에는 한때 400t 이상이 생산되었지만, 1982년 연간생산량은 27t, 1983년 5t으로 급감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 폐광되었다.
옥방광업주식회사는 애경그룹 창업주인 채몽인(蔡夢印)이 1945년에 설립한 회사였다고 한다.
옥방마을에서 14세부터 살고 있다는 황정욱(81세) 어른에 따르면 “옥방이 번창할 당시에는 당구장, 다방 이발소, 양복점, 미장원, 술집, 구멍가게들이 즐비했다. 또한 간조(노임의 속된 말) 날에는 비단장사 들이 울진 땅 광회파견대에서 옥방중학교까지 약 1km구간의 도로 양쪽으로 늘어서서 장사를 하는 것이 장관이었다.”
마을 중심부를 지나서 남회룡 마을로 올라가는 좌측에는 폐교된 옥방중학교가 있는데 처음에는 1952. 11. 15일 개교한 옥방국민(초등)학교였으나, 1971년 전국적으로 중학교 무시험이 시작되면서 초등학교는 울진 땅의 광동초등학교와 통합하여 강 건너 울진 땅에 옥방초등학교를 신설하였고, 옥방초등학교는 1971.3. 20일 소천중학교 옥방분교로 개명하여 옥방과 인근 마을의 학생들이 입학하여 학교를 다니다가 1995. 3. 1일자로 졸업생 1,084명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옥방중학교는 한때 여학생들이 핸드볼을 잘하여 전국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 운동장 오른쪽 끄트머리 쪽에는 폭구소(沼)라고 하는 회룡천에서 내려오는 작은 소(沼)가 있는데 객지로 나간 옥방 사람들이 가장 많은 추억을 간직한 곳이라고 한다.
폐교된 중학교를 약 500m지나 올라가면 길 오른편에 황정욱 어른이 산공부를 하다가 발견한 샘물(옥방약수)이 있고 그곳 지명이 대구촌이라고 불렸는데, 대구관이라는 요정이 있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옥방천 건너편 지명은 대구촌 동편 마을이라서 대구 동촌으로 불렸으며, 대구관 주변에는 요정이 15개정도나 되고 요정 여종업원들이 많았으며, 우스개 소리로 도시 여종업원들 사이에는 “너 옥방 갔다 왔나?”하는 말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황씨 어른이 찾은 약수터를 지나서 남회룡로를 따라 약 500m 올라가면 도로 오른편 바로 옆에 폐광된 광산의 갱구가 있는데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오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나와서 오고가는 길손들의 쉼터가 된다.

↑↑ 팔팔동굴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정완규 송덕비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갱구 이름은 8호항 인데 동네 사람들은 바람을 쐬고 나면 축 늘어 졌던 사람이 팔팔하게 기운이 돋는다고 팔팔풍혈이라고 한단다.
길 건너편 울진 땅에는 당시에 통고항, 안전항, 11호항, 백운항으로 불렸던 갱구의 흔적이 남아있다.
팔팔 풍혈을 지나서 약 300m 를 더 올라가면 옥방천 건너 당시의 선광장이 있던 곳에 남아있는 중석의 버럭(중석을 캐고 남은 깨진 바윗돌)에 붙어있는 중석을 채취하기 위하여 요즘도 작업을 하고 있다.
일본인 아부오랑과 김상순이 중석맥을 발견한 문바우골(文巖溪谷)을 지나서 회룡천이 흐르는 남회1교를 지나면 좌측에 울진군 금강송면의 홍이동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아주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지금의 삼척 땅인 실직국(悉直國)과 현 울진군인 파조국(波朝國), 강릉 지역의 예국(穢國)이 삼국간에 세력다툼을 벌이다가 실직국이 파조국을 합병하고 난 후 실직국의 안일왕(安逸王: 일명 에밀왕)이 예국의 침략을 받아 현재의 석포면 승부역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하게 되자 배바위산을 넘어 분천,광비,옥방,남회룡리를 거쳐서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애미랑재를 넘어 수하계곡을 지나 왕피리로 피난한 후 산성을 축성했다고 하며, 왕이 피난했다고 왕피리, 홍이장군이 주둔했다고 홍이동, 에밀왕이 넘은재가 애미랑재가 되었다고 한다.
홍이동 골짜기를 지나서 약2km를 올라가면 애미랑재를 경계로 낙동정맥이 자나가는 울진군 금강송면 광회리,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 봉화군 소천면 남회룡리 모래밭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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