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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들의 영화 - Ⅳ

2019년 05월 06일(월) 14:03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박하식-소설가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이전호에 이어서>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과 김진기 헌병사령관 등이 먼저 와있었다.
초대자인 전두환 사령관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가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총장공관에서 불법 납치되고 전군에 비상계엄령이 내렸다는 급보를 받은 것이다.
아차, 속았구나! 계엄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속상관이다.
총잡이에 의해 잡힌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끝났다. 급히 전투사령부로 돌아온 정장군은 여단을 점검해보니 윤흥기 장군만 정 위치에 있을 뿐 박희도 최세창 등 다른 여단장들은 정장군의 허가도 없이 근무지를 이탈, 쿠데타군에 가담한 상태였다.
“저질렀구나!”
정장군은 장태완 사령관과 함께 사태수습을 위해 뛰던 중 노태우 사령관으로부터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쿠데타군에 합류해 달라. 아니면 당신만 다칩니다.”는 간곡한 부탁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정 장군은 사태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하극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때 정 사령관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도 쿠데타군에 가담한 육사동기로부터 곧 쳐들어가는데 정장군을 호위하면 너만 죽으니 호위하지 말고 피신하라는 사전 연락을 받는다.
그러나 김 소령은 동기의 간절한 호소에도 피하지 않고 정장군의 직속부하 H장군이 지휘하는 공수특전여단 병력으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고 끝까지 정장군을 호위하면서 M16으로 공격해오는 쿠데타군을 권총으로 대항하면서 싸우다가 가슴과 배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그는 “상명하복” 군인의 길을 걸은 것이다. 집중사격을 받은 정장군은 팔과 어깨 등에 세발의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김 소령은 육사 수석졸업생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모범군인이었다. 김 소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은 그 자리에서 충격을 받고 실명을 한다.
눈이 먼 그 부인은 곧 남편을 따라 죽는다. 어머니도 아들을 따라 곧 저승길을 간다. 그 집은 멸문이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정병주 장군과 김오랑 소령은 군인의 길에 “하극상은 없다”고 배웠다. 정장군은 30년 동안 그런 군인의 길을 걸으며 조국을 지켜왔다.
6.25때 상명하달에 의해 낙동강과 대동강을 넘나들며 죽도록 싸웠다.
전쟁의 사선을 넘고 지키며 상명하달의 군인의 길을 지킨 정병주가 죽일 놈인가 하극상으로 상관에게 총을 쏘고 정부를 무너뜨리는 너희들이 죽일 놈인가. 하고 외쳤다.
후일 “집권을 한 그들은 육사에 가서 후배에게 그리고 역사 앞에서 군인의 길을 저버리는 하극상을 뭐라고 가르칠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정병주장군(1928~1988)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1리 배해마을이 고향이다.
영주초등(제28회) 안동농림(김재규 1년 후배)를 거쳐 육사 9기, 소위로 임관을 받자말자 6.25가 터져 참전했다.
곧바로 전선에 뛰어들어 피비린내 나는 한국전쟁을 다 겪고 휴전이 되고 후일 김계원 육군참모총장 김재규 등과 함께 지휘관으로 군맥을 이었다.
본관은 봉화(奉化)로 조선 개국공신, 학자, 정치가, 혁명가인 삼봉(三峰) 정도전의 피를 받은 후예이다.
그 후 정장군은 1988년 11월 9일 서울 서대문녹번동 자택에서 이웃 동서 집에서 생일 축하파티를 열었다.
친지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정담을 나누다가 밤11시쯤 헤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소식이 끊겼다. 5개월 후인 1989년 3월 경기도 양주군 어느 군부대 야산에서 목매 죽은 변시체로 발견됐다.
그날 밤 같이 술을 마신 친척들은 “정장군은 자기 마음이 시키지 않는 것은 안 하는 사람이다. 그곳에 갈 일도 없으며, 그날 밤 술자리에서도 그런 눈치는 전혀 살필 수 없었고, 또 굳은 신념의 소유자인 그는 천주교 신자로, 평소 생명의 존엄성을 지극히 주장하는 사람으로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5개월 후 발견된 시신은 부검결과 사인은 자살로 판명되었으나 상황은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는 부패한 상태였다.
어쨌든 그는 그런 죽음으로 일생을 마쳤고, 그의 죽음은 가족들 가슴에 오늘날 이 하늘밑에 슬픔으로 남았다.
만약 그때 정장군이 전두환 사령관의 전화를 받았을 때 “천운이 그렇게 돈다면 하는 수 없지.”하고 동의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잘 해보게!” 하는 자기 영혼과 양심에서 나오는 마음을 떠난 한 마디만 했다면, 후일의 정병주장군은 국방부장관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국회의원에 자신이 하고 싶은 높은 벼슬은 다하고 이 땅의 영화는 다 누렸을지 모른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뿐인가.
자기 자신을 수호하던 김오랑 소령을 비롯한 군인의 길을 걸은 부하와 여러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와 그 가정들의 참혹한 몰락을 가져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는 총리 공관으로 찾아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앞에서 어떻게 했을까.
전두환 사령관의 뜻을 정병주장군처럼 일언지하에 거절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 땅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최규하 대통령은 왕권은 하늘의 뜻이라고 따른 것과 정병주장군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믿은 차이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그 후 현석(玄石) 최규하 국무총리는 대통령권한대행에서 제10대 대통령에 올랐다가 그 자리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물려주고 최고의 영예와 영화를 누리며 정병주장군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대통령으로 무궁화대훈장과 벨기에 왕관십자대훈장을 받는 등 업적을 남겼다. 그 분이 사후에 무슨 글을 남긴다는 소문은 사후 남긴 것이 없고 그분이 또 쓰거나 무슨 남기고 싶은 명분의 할 말이 있었을까.
시인 묵객들이 꼭 한번은 찾는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동해의 절경 월송정(越松亭)은 신라시대 때 화랑들이 울창한 송림에서 솟대를 걸고 달을 즐기는 선유도를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 월송정에 가면 정자에 “대통령 최규하”란 현판이 걸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동해의 푸른 바다를 말없이 내려다보며 지난 세월을 말하고 있다.
커다란 현판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다는 기억이 떠오른다.
2천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모처럼 영주 선비촌 정부의 웰빙 상표를 획득한 특산품 영주소고기를 먹으러 일행이 시내 축산식육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길 가에 경찰관들이 여럿 서 있고 사복을 입은 형사인 듯한 사람이 앞을 막았다.
“오늘은 축산식육식당은 삼가주시고 다른 식당을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요?”
“지금 최규하 전 대통령께서 소백산 등산을 오셨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식사 하는 식당에는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갑니까?”
“못가는 것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닙니까.”
“전직 대통령도 시민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또 대화도 나눌 수 있고요.”
나는 사실 최대통령을 만나면 처음 총리공관에서 전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을 때 상황에 대해 묻고 싶은 가슴에 쌓인 한이 있었다.
호위병과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국민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대한민국은 왜 시민들은 전직 대통령이 식사하는 식당에도 못 들어갈까.
국민들은 전직대통령이 시민과 다른 모습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임금과 신하와 왕과 거지가 다를까.
우리나라는 언제 전직 대통령이 자연보호에 앞장서고 경찰이 어린이 노약자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너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경찰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고, 국민들이 차별 없는 전직대통령의 권위 앞에 대화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오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좁은 골목길에 버스만한 크기의 외제차 리무진 두 대가 도로를 길게 막고 있었다.
이 땅의 이런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나는 종교는 믿지 않지만, 지옥과 천당은 꼭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세가 없다면 인생은 너무 허무하고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 세상에 죄와 벌은 없다하더라도 내세에라도 그런 천당과 지옥이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감옥보다 더 무서운 양심의 감옥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 신과 인간 앞에 몹쓸 짓을 저지른 죄 많은 인간들은 죽어서 꼭 지옥으로 가 불 심판을 받아야 하고, 정의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천당이 있어 낙원으로 가 그곳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세가 없다면 인간들은 누구나 동물처럼 본능에 충실 하는 삶을 살려할 것이다.
쾌락에 살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신은 없다” “천당과 지옥은 없다”고 새삼 종교의 허황됨을 떠올리다가도 현재의 내 앉은 자리를 보라.
그것이 전생 업(業)이다. 업에 따라 산다는, 남의 마음은 비우라 하고 자기 마음은 못 비우는, 남의사랑은 불륜이고, 자기 불륜은 인연이라 하는 종교라 할지라도 천당과 지옥만 있다면 그 종교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우주에 정의는 없다.
자연의 섭리로 볼 때 존재의 의미는 선악도 없고, 삶의 길은 정답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일생을 선택의 길 선상에서 산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길을 택하여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할 것이다.
김시습 정병주장군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고 신숙주 최규하 대통령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고려 말에 죽은 충신의 길이 맞는 것인가 김오랑의 상명하복이 맞는 것인가.
김시습 정병주장군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길인가.
신숙주 최규하 대통령처럼 사는 그런 선택의 길이 맞는 길인가.
어느 삶이 맞는 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김시습 정병주장군은 왜 세상 영화의 길을 택하지 않고 버리고 스스로 천하게 사는 목숨을 끊는 죽음의 길을 택했을까.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섰다면 어떻게 했을까.
평생 불의의 승자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정의의 패자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인가.
나는 사나이다운 정의의 길을 가려고 신문기자의 길을 걸었다.
이 땅에 그런 정의의 신문은 있었는가.
용기와 신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정의의 필봉을 휘둘렀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고, 정의로운 일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불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는가.
나는 오늘날까지 두 길 중 어느 길을 택하여 살아왔는가.
정도와 도덕적인 길을 가려고 애썼는가.
누추하게 살지라도 권력 앞에 아부하며 살지는 않았는가.
내가 나의 늙은 본 모습을 바라본다.
힘 앞에 바른 말을 못하고 비겁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불의를 보고도 못 본채 뒷걸음질만 쳤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은 내 관상이 이중인격자라 했다.
맞다. 사회악의 무언의 동조자로 비겁하게 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슬프다. 왠지 가슴이 저려오면서 울컥 서럽다.
나는 내 가슴에 대고 오늘도 물어 본다.
나의 본성은 무엇인가. 악인가 선인가. 이타적인가 이기적이었는가.
그리고 하늘에 물어본다. 푸른 하늘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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