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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마·을·탐·방 (48) - 금봉저수지 마을 봉성면 금봉2리 대추정

봉화문화연구회 김 옥 랑

2019년 05월 19일(일) 16:12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금봉저수지 둑높이기 기념 표석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금봉2리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홍종록 어르신 내외분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천성사 내부 불상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금봉2리 대추정 마을로 오르는 길은 금봉저수지 둑 높이기 사업 덕에 도로도 깨끗하게 포장 되어 널찍하니 마을 옆으로 돌아든다.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옆 언덕에 금봉저수지를 알리는 표석과 함께 둑 높이기 사업 현황이 화강석에 적혀있다.
거기엔 200여억원을 들여 2010- 2015년 사이에 조성되었고, 906ha 328만톤의 총저수량을 알리고 있다. 대추정 마을은 저수지 바로 뒤로 보인다. 마을이름은 옛날부터 대추가 많이 나서 대추정(大秋亭) 혹은 조정(棗亭)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마을에 들어서니 옛 예비군 무기고가 문이 떨어진 체 방치되어 있는 게 보인다. 50여년 전 간첩사건 이후 향토방위를 위해 총기를 보관하던 곳이다.
마을 가운데는 회관이 정자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낯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신 듯 어르신 한분이 내다보신다. 이 마을에 오래사신 분을 여쭤보니 홍종록(76)어른 댁을 가르켜 주셨다. 요즘 보기드믄 널찍하고 환한 흙 마당이 있는 집에 들어서니 홍씨 어른 내외분께서 반겨 주신다.
원래 민씨들이 자리 잡고 살던 곳인데, 남양 홍씨들이 들어와 터를 잡은 것은 200여년 전 고조부 때라고 하신다. 5대조 때 사화(士禍)에 연루되자 낙향하여 명호 양곡 가름고개에 터를 잡고 사시다가 3형제분이 대추정으로 이주하셨고 조부 형제분이 6형제로 22종반을 자랑할 정도로 세가 늘어나자 민씨들은 차츰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갔다.
반면 진성이씨, 한양조씨 등 다른 성씨들도 인연을 따라 들어왔다.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집안이 많을 땐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복을 돌리다 보면 새벽닭이 울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대추정에 세가구, 덕마에 1가구만이 남아 있다.
마을도 한때 40호가 넘을 정도로 북적였는데 지금은 10여호 20여명이 안 되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홍씨 세가구, 이씨, 최씨, 김씨 등이다.
2018년 문수골 권역 사업으로 새 단장을 한 성황당은 마을 건너편 산자락에 고풍스런 한옥 건물로 지어져있다.
성황당 신주를 새로 들이는 과정에서 신주 뒷편에 적은 글을 보니 大吹亭城隍(대취정성황)이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대추정이라는 마을 이름은 대취정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년 정월 열나흗 날에 지내는 당제는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제관을 정하고, 제관은 몸과 마음을 사흘 전부터 정결히 하여 지내 왔으나 주민들이 줄고 노령화되어 지금은 당일 장보고 당제를 모신다며 아쉬워 하셨다.
그럼에도 1962년부터 적어온 고사장부에는 그동안 지내온 당제의 제관이며, 제물, 세금영수증들이 깔끔하게 기록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사료가 될 것 같다.
대추정 마을은 원래 논이 많아 쌀농사를 주로 했는데, 30~40여년 전부터 과수농사가 시작되더니 지금은 논은 다 없어지고 과수원이 들어섰다고, 농사도 세태를 따라 변화하여 이 산중에도 억대 농사꾼들이 많다고 자랑하신다.
금봉2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버섯 채취이야기이다.
예전에는 그저 먹는 것으로 생각하던 송이버섯이 1970년대 초반 경주사람들이 수출을 위해 봉화에 채취하러 오면서부터 송이산을 지키고 송이버섯을 현금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마을 논 200마지기 소득보다 송이버섯 채취소득이 더 컸다고 하니 산골사람들의 마음에 바람이 들 수밖에 없었겠다. 당시에는 송이버섯 채취량도 많아 지게로 지고 나오고 몇이서 함께 들고 나올 정도였는데 지금은 먹을 것도 따지 못할 정도로 양이 줄었다며 한때 남의 뒤를 따라 동네 앞산의 송이 채취권을 사서 일꾼을 세워두고 했다가 한해 산값만 겨우 하고 마무리 지었다며 웃으셨다. 그래도 그때는 온 동네가 골드러시라도 만난 듯 활기차고 신이 났던 때라고 한다.
6,25전쟁 때는 어린 나이였지만 금봉저수지 밑 마을과 동양리 일대에 소개(疏開)되어 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앞 감나무가 집과 함께 불타 감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때 당시에는 북한군이 찾아오면 남자들이 아픈 시늉을 하거나 끌려가지 않기 위해 꾀를 쓰곤 했지만 그럼에도 식량이나 부식 등을 나르기 위해 강제 부역을 따라나서 돌아오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 마을 길 주소는 “꿀덩이 길”로 되어있는데, 이는 1킬로나 떨어져 있는 천성사가 있는 마을이 꿀티로서 밀원(蜜源)이 많아 그렇게 불러서 꿀덩이 길이라고 이름 부쳤다고 한다.
하지만 대추정 마을에서 평생 사셨다는 홍씨 어른은 꿀티에는 밀원이 많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고 오히려 집안 족보에 보면 굴등산(屈登山)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니 꿀과 관련 없이 굴등산이 변하여 꿀티로 바뀐 것이 아닌가 한다고 하셨다.
꿀티에는 예전에는 두 세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천성사만이 자리하고 있다. 천성사는 1952년 주지 완휴(속명 이화성)스님에 의해 지어진 태고종 사찰이다.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주불(主佛)로 모신 석조여래입상과 삼층석탑이 유형문화재 133호, 134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소장 사찰이다.
법당 앞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목이 잘린 불상을 스님이 목을 이어 세워둔 불상이 있다.
종교 이전에 삶으로 백성들 사이에 살아왔을 불상이 당한 몰염치에 저절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법당안의 석조여래입상도 아름답지만 법당 앞에 비와 먼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있음에도 여전히 말없이 지키고 선 부처님은 어쩌면 우리들 모두에게 감사한 존재이지 않은가.
예전에 시어머니를 따라 천성사를 다니던 생각이 난다.
그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적막감마저 돌아 그때처럼 시끌벅적한 법석(法席)이 그리워진다.

강선희 기자  rkd92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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