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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儒林)독립운동과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2019년 11월 17일(일) 21:15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농암 김 중 위 - 前 환경부장관, 4선의원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파리장서운동은 유림독립운동의 결정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을미의병으로부터 시작된 유림들의 독립자강운동은 3.1 운동을 거치면서 더욱 구체적이면서 국제화되기에 다다른 것을 본다. 3.1 독립선언서에 유림의 대표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그들은 제각각 자신이 처해있는 자리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영남에서의 김창숙과 곽종석, 호서지방에서의 김복한이 독자적으로 작성한 독립청원서를 훗날 하나로 묶는 작업이 이루어 진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호남에서의 유림의 거두 전우의 유림독립운동의 참여거부는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어찌 되었거나 유림독립운동의 한 복판에는 심산 김창숙이 있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매천 황현이 “나라가 망하는데 어느 누구 배운 사람으로서 이를 서러워하며 죽는 사람 하나 없다면 그것이 말이나 되는 것이냐!” 하면서 자결했던 심정과 같은 심정으로 심산은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유림의 대표로 분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을사5적’을 참(斬)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부터 시작된 심산의 애국독립운동은 해방되는 날,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위정척사에 앞장섰던 유림들이 의병활동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는 운동이 세칭 파리장서운동이다.
필자는 이 파리장서운동이야 말로 제2의 3.1 운동이라고 평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3.1 운동의 불씨가 꺼져가려는 즈음에 전국의 유림들이 다시 한 번 불씨를 당겼다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도 심산이 상해에 당도한 뒤에 세워졌는데, 우연은 아니라 할 것이다.
여하튼 심산의 일생을 보면 백절불굴의 정신 그 자체였고 애국지사 중의 애국지사였다.
유림(儒林)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는 이유로 대구형무소에서 14년의 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는 과정에 그는 극심한 고문에 그만 앉은뱅이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호를 앉은뱅이 즉 벽옹(躄翁)이라고 지으면서도 자신을 한 번도 훼절하지 않았다.
일본의 강압에 자신의 뜻을 굽힌 많은 훼절자들을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고 분개하면서 재판과정에서는 변호사도 필요 없다고 거절한 분이었다.
일본 법률의 재판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형무소 생활을 하면서는 단 한 번도 간수(看守)들에게 목례 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숱한 모욕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더욱 더 의연하게 그들을 꾸짖으면서 고매한 자신의 인격을 지켜 냈다.
그의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독립운동에 잃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산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과 만해 한용운 선생, 3분을 합해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3절(節)’로 추앙하자는 사람도 있다. 해방된 조국에서의 심산선생은 반공과 반독재와 민주화를 위해 누구보다도 올곧은 발걸음으로 일관하였다.
신생 대한민국의 먼 장래를 위해 스스로 창립한 성균관대학교의 초대 총장자리도 ‘자유당정권’에 의해 빼앗기면서도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나라의 통일과 반독재를 위한 포효(咆哮)로 만년(晩年)을 불태웠을 뿐이다. 어떤 정당 참여도 어떤 관직의 유혹도 뿌리쳤다. 해방된 조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을 수여 받았다.
돌아가셨을 때에는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참으로 청사에 길이 남을 자랑스러운 애국지사였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심산 김창숙 선생과 우리 집안과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심산은 의성 김씨 문중의 문정공파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세 종손으로 경북 성주의 ‘사도실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혈맥으로 보면 그의 부친 김호림(金頀林)이 의성 김씨 집성촌인 내 고향 경북 봉화 ‘해저마을’의 입향조인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동강의 형)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개암의 후손으로 태어나 그 동생인 동강의 종손으로 양자를 갔다는 얘기다.
그의 부친 김호림이 해저에서 성주 사도실로 양자를 가게 된 경위를 보면 참으로 놀랄 일이다.
양부 될 사람이 해저에 와서 몇 달을 눈여겨보면서 고르고 골라 데려간 아들이 바로 김호림이고 그 김호림의 아들로 심산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기록상으로 보면 파리장서 운동에 참여한 문중사람으로 사도실에서 보다는 해저사람이 월등히 많은 것을 보면 혈맥이 보여준 끈끈한 정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는 내 증조부(順永)님의 역할도 한몫 했으리라 짐작이 된다.
심산은 독립청원서 초안을 가지고 비밀리에 해저마을에 들어섰다.
가까운 친척(鴻基)집에 묵으면서 그 초안을 놓고 회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내 증조부는 이미 60대 중반의 마을 어른의 입장에서 이건 젊은이 보다는 마을 어른들이 앞장 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앞장 서 서명운동을 주도 하였다.
이유가 있었다. 증조부님의 생각으로는 이번 한 번의 청원으로 독립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이번에는 늙은이들이 앞장서고 젊은이들은 후일을 기약하자는 뜻이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증조부께서는 안동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끌려가 3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그 사이에 증조부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당하셨을까! 안 봐도 알만한 일이다.
그 옥살이 중에 안질(眼疾)이 걸려 종래에는 한 쪽 눈을 잃으셨다.
이때의 일이 역사적으로는 제1차 유림독립운동으로 기록된 일로 해저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된데 이어 곧바로 제2차 유림운동이 일어나 또 한 번의 소용돌이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심산이 상해로 떠났다가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해저 마을에 와서 독립자금을 얻어 간 것이 왜경(倭警)에 들통이 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산의 입장으로는 본인의 생가인 성주는 이미 왜경에 노출된 요주의(要注意) 마을이지만 해저는 그래도 그보다는 덜 주목받는 마을이었기에 당신의 부친 생가(生家)쪽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강선희 기자  rkd92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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