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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항일운동(抗日運動)을 되돌아 보며

2021년 03월 01일(월) 20:18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김 동 룡 - 전 봉화부군수, 행정학 박사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올해도 어김없이 3월이 찾아왔다.
우리는 한 달 한 달을 새로 맞으면서 1월은 새해맞이, 2월은 설날 명절, 5월은 가정의 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처럼 달마다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3월은 3.1만세운동과 관련한 ‘항일운동(抗日運動)의 달’이라 하겠다.
3월 1일은 ‘삼일절’로 국가에서 정한 5개 국경일(國慶日)중의 하나이다. 개인적으로는 ‘삼일절’이 경사스런 날도 아닌데 왜 국경일이 되었는지 의문이 있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피맺힌 절규와 목숨을 건 저항을 기념하는 날이다.
일제 강점기 봉화에서의 항일운동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소장하고 있던 『봉화의 독립운동사』(김희곤 저, 2007) 책을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여기서는 봉화의 항일독립운동 상황을 개략적으로 추려보고자 한다.
봉화인들의 항일독립운동은 1894년 갑오의병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국독립운동사의 흐름과 맥을 같이했다.
독립운동의 시작은 의병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초기에는 안동의진(安東義陣)에 참여하기도 하고, 유곡 출신 권세연, 해저 출신 김하림, 문촌 출신 금석주가 봉화의진(奉化義陣)을 구성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1904년 이후에는 봉화지역에서 의병활동과 전투는 더욱 활발하였는데, 거촌출신으로 대한제국군대 하사 출신인 변학기가 거느린 부대의 활동이 뚜렷하고, 소천 임기출신의 이춘양, 정경태 부대에서 활약한 내성출신 신대룡, 법전 출신의 강찬호, 강원도에서 활약한 상운 문촌출신 금기철과 물야출신의 김종철 등이 대표적이다.
봉화지역에서 일어난 주요 의병전투를 소개하면, 첫째 ‘봉화전투’로 1907년 8월 30일과 11월 10일 민긍호 부대가 중군장 변학기를 주축으로 2차례에 걸쳐 봉화군청 소재지(현 봉성면소재지)를 기습 공격하여 무기고와 탄약고, 관아를 불태운 전투이다.
두 차례의 전투로 봉화군 관아를 비롯해 봉성은 완전히 불타고 봉화군청은 춘양면 의양리로 이전하였으며, 적병(敵兵) 사살 50명, 부상 70여명의 전과를 거두었으며, 의병의 피해는 전사 11명에 부상20여 명이었다고 한다.
둘째는 ‘서벽전투’로 이강년부대는 1908년 5월 17일 새벽에 춘양 서벽리 동쪽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榮川,현 영주)수비대 소속 11명을 포위하여 4시간 동안 전투를 벌여 일본군 5명의 목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벽전투가 있던 격전지는 현재 서벽초등학교 입구 항일의병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당시 의병은 일본 군경의 목을 베어 서벽초등학교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
셋째는 ‘내성전투’로 서벽전투에서 내성으로 퇴각한 일본군경을 추격하여 5월 18일 변학기를 비롯한 의병 1,200여명은 내성을 습격하여 교전한 뒤 물야 오록으로 퇴각하였다.
넷째는 ‘재산전투’로 1908년 6월 4일 현재의 재산면 동면2리 ‘구렁마’에서 이강년부대 의병 700여 명과 일본군 20여명이 벌인 전투로 일본군을 격퇴하였지만 의병은 사망 10명, 부상 8명의 손실을 입었다. 전사한 의병은 동면저수지 위쪽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1970년대 초 새마을사업으로 농로를 확장하면서 훼손되었다고 한다.
한국독립운동사의 분기점이라고 불리는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봉화와 춘양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내성장날 만세운동은 내성공립보통학교(현 봉화초등학교) 교사 이육상과 졸업반 학생 이구락이 주도하여 3월 16일 학교 숙직실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3월 17일 내성장날 학생들과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핵심역할을 하던 이육상 선생과 학생 12명이 일제 헌병들에게 붙잡히면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후 4월 5일 춘양 서벽시장에서 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작은 산위에서 춘양공립보통학교(현 춘양초등학교) 학생인 정태준, 이인락, 이봉학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경찰에 붙잡혔다. 이처럼 봉화의 만세운동은 학교선생과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특징이 있으며, 군 전체가 참여하는 단계로 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
한편, 1차세계대전의 전후(戰後) 처리 논의를 위해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한국문제 상정과 한국의 독립 청원을 주장하는 ‘파리장서(長書)’를 보내는 거사에는 김건영을 비롯한 해저출신과 권상원을 비롯한 유곡출신 인사들이 중심이었다.
파리장서에 참가하거나 서명한 봉화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 이유는 심산 김창숙과 봉화와의 인연이 절대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에 유곡마을 안동권씨 문중에서 5명, 해저 의성김씨 문중에서 3명이 서명하였으니 많은 숫자임에 틀림없다.
올해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지 102주년이 되고, 광복을 맞은 지 76주년이 되는 해이다. “힘없는 민족과 국가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멸망한다.”고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적어도 우리가 국경일로 기념하는 ‘삼일절’과 같은 유산을 후대(後代)에 물려주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가 힘이 있었다면 ‘삼일절’과 같은 기념일은 없어도 될 만한, 필요 없는 국경일이다.
우리는 삼일절과 같은 국경일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니 다시는 그런 날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휴일이 아닌 국경일로서의 참 뜻을 새겨, 최소한 ‘우리는 집집마다 태극기라도 게양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해본다.

홈페이지관리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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