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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의 충효열-14>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죽음으로 맞선 계촌 김도현 선생

2021년 10월 04일(월) 18:41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읍 삼계서원이 있는 생기마 뒷골을 가내골 현재모습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봉화읍 삼계서원이 있는 생기마 뒷골을 가내골이라 하는데, 이 골짜기 어느 곳엔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상소한 이도현 선생이 이 일로 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도현李道顯(1726- 1776)선생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치문穉文이며, 호는 계촌溪村이다.
공의 조부는 인부仁溥이며, 부친은 개槩이고 모친 선성김씨는 병조정랑을 지낸 만주萬柱의 따님이고, 부인 진성이씨는 세보世輔의 딸이다.
1762년(임오년 영조 38)에 임오화변壬午禍變이 일어났다. 이는 사도세자가 부친 영조에 의해 1762. 7. 4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은 변고를 말하는 것으로 1968년 사도세자의 옛 묘지에서 발견된 묘지墓誌에 영조가 누워서 받아 적게 했다는 내용을 보면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략하였더라.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짐의 30년의 의리를 밝힌 것이니 오호라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라고 변명하고 있다.
이 일로 공이 늙으신 모친 때문에 울음을 삼켰으나 비분강개하여 마치 살려는 뜻이 없는 듯하였다. 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새로운 정치를 기대하며, 조야가 눈을 비비고 바라보았는데, 공이 “하늘의 뜻이 때를 기다려 왔구나” 라고하며 곧바로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하여 사실대로 진술함에 숨김이 없었다. 먼저 주상의 원통함을 설욕하지 않을 수 없고, 여러 적신賊臣은 조금도 용서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마지막에 또 성조께서 무고를 당했음을 거듭하여 따졌으니 모든 말이 다른 사람은 감히 말하지 못할 바였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를 말렸으나 공은 웃으며 “한 번 죽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지금 태조를 위하여 죽음은 사도세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니 죽어야 할 곳에서 죽을 뿐이건만 무슨 한이 있으리오.” 마침내 몸을 떨쳐 한양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무리 중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가 자주 염탐하였다. 같이 따라간 맏아들 응원應元이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서 나라를 위해 죽기를 맹서했으니 소자 또한 아버지를 위하여 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상소문을 올리니, 제왕의 위엄을 범했다고 국문을 받아 혹독한 매질이 처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은 이미 턱이 내려앉고 창자가 찢겼는데도 오히려 정신은 어지럽지 않았고, 낯빛은 온화하여 상소문을 낭송하는 소리가 어전을 뒤흔들었고, 손수 공초供招(조선 때 죄인이 범죄사실을 진술)를 쓰는데, 자획이 꼿꼿했으니 이는 생사를 가슴속에 담지 않았던 때문이었으리라.
이윽고 조용히 왕을 향하여 사배를 올리고 죽음에 나아갔으니 당시 나이 50세(1776 병신년)였다.
가없는 푸른 하늘아 이 어인 일이더냐! 어떤이는 지위를 벗어난 일이라고 흉을 봤지만, 공은 종실과 고락을 함께해야 할 처지에 있었으니, 어찌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들 응원應元도 직언하여 같은 날 형벌을 받도록 간절히 청하여 저택瀦宅(중죄인의 집을 헐어버리고 물을 대어 못淵을 만들던 형벌)의 화가 미쳤으니 오호라! 그 처참함이여!
차남 응인應寅도 아버지가 상소한 일로 16세에 체포되어 안동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어떤 이가 나이를 줄여 살아나길 권하였으나 임금을 속여 구차스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고 하고는 마침내 바른대로 고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장녀는 이미 시집갔으나 차녀는 미쳐 혼례를 못 올리고 있어 호남지방에 노비로 갔는데, 관노가 겁탈하여 욕보이자 가슴을 찔러죽으니 집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다행히 응원의 아들 성건性健은 겨우 6살이어서 풍천(황해도 풍천군)의 추도에 유폐되었는데, 일곱 아들을 두었다.
고종 36년(1899 을해년)에 공이 신원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내부협판內部協辦에 증직되었으며, 아들 응원은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승秘書院承의 작위를 받았다. 공의 묘갈명은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지었고, 응원은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고유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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